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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들딸 잃은 충격, 슬픔의하나님

① 영원한 독자를 잃은 하나님

 순수한 본질적인 사랑을 지닌 하나님 앞에 이상적 대상으로 그리던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여 떨어져 나갔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어요? 어떤 인간보다도 지극히 슬펐을 것입니다. 지극히 지극히 비통했을 것입니다. 그 내용이 깊고 가치있는 내용일수록 비참 중의 비참이다 이겁니다. 그런 하나님이 잃어버린 자식들을 다시 찾기 위해 복귀의 길을 더듬어 나서는 것입니다. (127-18, 1983.05.01)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그렇게 믿고 있는데도 자식이 배반할 때, 그 믿음에 비례해서 부모가 받는 충격과 고충, 그리고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생명을 걸고 서로 사랑했던 사람이 배반하고 배척하여 불신할 때도 역시 말할 수 없이 비참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몸부림치며 겪는 고통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릅니다. 말만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일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어 비참해졌느냐?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닌 구체적인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간과는 최고의 관계를 가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있다면, 인간과 더불어 기쁨으로 출발해서 끝이 없는 영원을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출발의 기점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출발의 기점을 인간으로 인해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아담과 해와의 타락입니다.
(20-205, 1968.06.09)

 세상에서도 부모가 환갑이 넘어 낳은 만득자(晩得子)인 7대 독자(七代獨子)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절망 중의 절망일 것입니다. 젊으면 또 낳을 수 있지만 만득자로 태어난 7대 독자가 죽는다면 7대권을 계승하려던 조상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조상들은 자기의 후손, 자기의 핏줄을 통해 세계에 없는 만복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자식이 죽는다면 부모는 따라 죽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7대 독자가 아니라 영원한 독자(獨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담을 가정을 이루게 하여 창조의 대업을 이룬 자리에 세우려 하였는데, 그 아담이 죽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렇게 일이 틀어졌을 때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6천년 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20-210, 1968.06.09)

 원래 창조원칙을 보면, 사랑 일체 이상권 내에 나가게 되면 영원한 소유주가, 사랑을 중심삼은 주체자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중심이 되어야 했는데 사탄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천지(天地)가 지천(地天)이 되고 전부 거꾸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참된 이상으로 바라던 사랑이상, 참된 사랑을 중심삼고 일체된, 한 몸이 된 것은 가를 수 없어야 할 것인데, 그 핏줄도 하나님의 직계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인데 그것이 틀어짐으로 말미암아 반대가 됐다는 것입니다. (206-236, 1990.10.14)

 인간의 비참상을 매일매일 시간시간 바라보는 그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겠느냐? 내 아들이 그렇게 병신이 됐다 할 때, 왕자 왕녀의 영광을 찬양해야 할 존재가 똥구덩이가 돼 가지고 지옥으로 거꾸로 꽂혀 버렸다 할 때, 전지전능하다는 하나님의 위신이 뭐가 돼요? 절대적인 하나님의 위신이 뭐가 돼요? 그 얼굴을 들 수 있겠어요? (218-240, 1991.08.19)

 아들이 희생되면 아버지가 아들을 죽으라고 내버려 두던가요? 이런 관점에서 사랑의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인 우리를 죽을 자리에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면 이상적 세계를 만들어서 부활시켜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두고 볼 때 그것은 가능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럴 수 있는 자리에 계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그러한 이상적인 부활권으로 옮겨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죽을 수 있는 곳, 비참한 곳에 우리 인간을 살도록 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고차원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한 하나의 관문으로 그런 곳을 두었다면 야, 그거 멋진 일이다 이겁니다.
(67-212, 1973.06.21)

 창조주의 위신까지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신까지도,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의 실존성까지도 잊어버리고, 그런 심정으로 아담과 해와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타락한 아담과 해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느냐, 이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7-291, 1959.10.11)

 오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울어도 본체만체 합니다. 아무리 슬퍼해도 본체만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사탄의 혈육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망하는 것을 보면 좋아하며 웃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놓고 지도하고 개척의 방향을 가르쳐 주려니 얼마나 수고로우실 것이냐? 하나님에게 위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섭리역사를 붙들고 나오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42-257, 1971.03.21)

② 하나님의 역사적 비참상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신다면 얼마나 분개하겠는가? 이 만민은 자신의 혈통적 후손이어야 하는데, 악마가 비참한 경지에 밀어 넣고서 ‘당신의 후손은 이렇게 처참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하며 하나님을 대해 조소(嘲笑)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또 ‘전지전능한 하나님인데 이 환경을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라고 할 때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들으면서도 듣지 못한 척하고, 냄새를 맡으면서도 맡지 않는 척하고, 느끼면서도 느끼지 않은 척해야 하는 하나님의 역사적 비참상을 여러분 생각한 적이 있어요?
(183-19, 1988.10.29)

 오늘날 기성교회에서 믿듯이, 전지전능하고 영광의 보좌에 앉은 하나님이라면, 자기 아들딸이 죽어가는데 그 보좌 위에서 ‘야, 이리 올라오너라. 내가 자리를 뜰 수 없다!' 그러겠어요, 보좌고 뭐고 집어던지고 내려가겠어요? 어떤 거예요? 그냥 있겠어요, 내려가겠어요? 왕관을 벗고 뛰어 내려가겠어요? 어떻게 하겠나 생각해 보라구요. (123-159, 1983.01.01)

 하나님이 소리를 질러 울부짖으면서 ‘내 아들아! 내 딸아!' 하고 부르시기를 몇만 년, 몇십만 년, 몇백만 년을 해 나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아버지이-!' 하고 목이 쉬도록 불러 봤어요? 혀가 말리고, 숨이 막히고, 눈이 감겨 뜰 수 없을 만큼 간절히 아버지를 불러 봤어요? 생명의 주체되는 그 가치를 품기 위해서 얼마나 뒤넘이쳤느냐 이겁니다. 그 뒤넘이친 비례의 기준으로 여러분의 인격의 기준이 측량되는 것입니다. (184-219, 1989.01.01)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그분을 대할 수 있는 아무런 내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타락한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의 눈은 속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오관 감정은 전부 속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지만, 공의의 법을 가지고는 상대할 수 있는 내용이 절대 없지만, 사랑의 법을 가지고는 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연한이 깊어갈수록 사랑의 철학을 가지고 살고, 사랑의 철학을 가지고 모든 것을 분별하면서 사는 신앙인이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10년이 지나고 20년, 30년의 생을 거치면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동적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149-37, 1986.11.01)

 하나님이 수천 년 동안 복귀섭리를 하시면서 수난길을 거쳐온 것은 하나님이 마음이 좋아서 참고 나온 것일까요?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류 역사 수만 년 동안 구원섭리를 해 나오면서도 아직까지 지치지 않고 계속하는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아닙니다. 사랑의 길을 찾아 나오기 때문에, 사랑의 아들딸을 찾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년을 하루와 같이 수난길을 넘고 넘을 수 있는 위대한 힘은 사랑이었느니라! 그거 맞아요? 맞습니다. (109-281, 1980.11.02)

 하나님이 불쌍해요, 불쌍하지 않아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불쌍하시냐고 하겠지만 아무리 전지전능하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아들딸을 잃어버린 충격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6천 년의 역사노정을 거치시면서 고생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35-88, 1970.10.04)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야, 이놈아, 왜 죄를 지었느냐?'라고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죄지은 사정을 잘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당신의 사정은 생각지 않고, 인간의 사정을 알아주려는 하나님입니다. 슬픈 자에게는 슬픈 사정을 갖고 찾아 오셨고, 고통받는 자에게는 고통의 사정을 갖고 찾아 오셨고, 억울하고 분통한 자에게는 억울하고 분통한 사정을 갖고 찾아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느 정도 사정을 통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환경 가운데도 그렇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심정을 갖고 찾아 오셨습니다. 너는 나를 배반해도 나는 네 아버지라는 마음이 있기에 6천 년이란 세월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9-231, 1960.05.29)

 통일교회는 뭐냐? 하나님의 심정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해방하자 하고 있습니다. 기성교회는 그런 말 한다고 우리보고 이단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잘난 대통령이라도 자식이 죽었다면 그 죽은 자식 앞에 대통령의 권위를 가지고 ‘아들이 죽었으나 대통령은 눈물 흘릴 수 없다.' 그래요?
  구석에 들어가서 코를 박고 통곡하고 나와서 쓱 쓸고 그러면 통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죽은 아들 영이 ‘애비 이거… 애비가 아니었구만.'할 것입니다. 죽은 영이 살아 있다면 그 애비를 도와주겠어요, 반대하겠어요? 세계 대통령이 됐든 누가 됐든 자기가 사랑하는 자식이 죽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다 그래야 됩니다.
(196-18, 1989.12.24)

 인간의 창조본연의 특권적인 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타락의 구덩이가 되어 허덕이는 무가치한 인생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내정적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저놈의 자식들이 본래는 내 사랑과 내 생명과 내 혈통을 통해서 직계 자식이 되어 하늘나라의 영광을 차지할 것인데, 패자의 탈을 쓰고 신음과 고통과 탄식과 절망 속에서 허덕이다 생명을 끊는 자리에 있으니 그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그런 하나님은 슬픈 하나님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총재는 하나님을 알고 나서 몇날 몇 주일을 통곡했습니다. 통일교회의 출발에는 그런 깊은 사연이 있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211-207, 1990.12.30)

 하나님의 마음 속에 고통이 있는 줄 아무도 모릅니다. 역사상에 나타나시고 지금 여기에 선생님을 통해 나타나셔서 그 깊은 사명을 밝혀 냈으니까 알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예수님도 그것을 몰랐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종교 지도자 중 그 누구도 그와 같이 숨겨진 우주의 비밀을 알지 못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앞에 선생님이 나타나서 우주의 비밀이 밝혀진 것입니다. (215-171, 1991.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