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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심의 마음가짐과 태도

① 모심으로 생활의 천국화 이룩

 하나님은 망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생활적인 주체성을 지니고 늘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의 주인으로서 함께 있는 것입니다. 모심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공동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꿈같은 얘기입니다. (168-111, 1987.09.13)

 하나님을 마음 가운데 모시고, 우리 인간이 몸 자리에서 완전히 하나될 수 있는 기원을 만들지 않고는, 이 악마의 세계를 청산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모심의 시대, 시의(侍義)의 구원시대라고 보는 겁니다. 모심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하나님은 저 공중에 동떨어져서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생활권내의 주체자로서 하나님을 모셔야 됩니다. (144-274, 1986.04.12)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하루에 몇 번이나 자각합니까? 24시간 가운데 몇 번이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낍니까? 모심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24시간 가운데 한두 시간 정도 모셔 가지고 되겠습니까?
  공기보다도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입니다. 물보다도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입니다. 밥보다 더 귀한 것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렇게 느껴져요?
(33-230, 1970.08.16)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모심의 생활을 해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신앙생활이었지만 앞으로는 모심으로 구원을 얻는 시대입니다. 본래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을 모심으로써 우리가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모시는 데는 여러분의 생활과 마음으로 더불어 모셔야 됩니다. (150-213, 1961.04.15)

 모심의 생활을 해야 할 우리입니다. 소망의 천국은 맞이했으나, 모시고 실천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천국은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즉 생활적인 면에서 주체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6-226, 1959.05.17)

 우리가 이렇게 배우고 듣고 모심의 생활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6천년 동안 인류가 허덕여 나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민족이나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개개인을 놓고도 부모의 심정을 갖고 대하고, 상처를 당하고 유린을 당하고 배척을 받고 찢기며 나오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8-252, 1960.01.17)

 성약시대는 사랑의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종교시대에는 사랑을 허락치 않았기 때문에, 고차적인 종교는 결혼을 허락치 않았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96-117, 1978.01.02)

 하나님은 우주의 중심존재이시므로 그 앞에 가까이 가면 천년만년 주관받더라도 더 주관받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모심의 도리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 인간도 그러한 자리에서 주관받을 수 있으면, 그 이상의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습니다. (77-328, 1975.04.30)

 믿음의 의니, 행함의 의니, 모심의 의를 추구하는 것은 왜냐? 의롭지 않고는 선악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계와 선한 세계가 갈라지지 않습니다. 그 라이처스니스 스탠다드 포인트(righteousness standard point;선의 기준점)가 되는 것이 뭐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행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모시는 것과 같이, 언제나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건 왜 그래야 되느냐?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의로운 자에 대해서는 참소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믿고, 하나님이 행하고, 하나님이 생활하는 모심의 환경에 처해 있으면 사탄이 간섭할 수 없습니다.
  사탄권 내에 있더라도,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과 같이 할 수 있는 의로운 기준이 벌어지면, 사탄은 거기서 후퇴하는 것입니다.
(161-218, 1987.02.15)

 행함의 구약시대가 지나가고, 믿음의 신약시대가 지나가고 모심의 성약시대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성약시대가 되더라도 행함이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하고 모심의 생활도 다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소생, 장성이 있고 장성 위에 완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건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161-218, 1987.02.15)

 통일교회에서는 모심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시의(侍義), 즉 모심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춘하추동 양복을 해 입는 남자들이 있으면 아버지께도 해드려야 됩니다. 그분이 체(體)를 가진 분이 아니기 때문에 대신 정성을 모았다가 한 절기가 되면, 그 모은 정성을 누가 보나 안 보나 자기 혼자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연보궤에 드리게 되면, 그 정성은 법궤에 쌓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관념적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체화(體化)되고 표현될 수 있는 생활이 되어야 됩니다. (48-328, 1971.09.26)

 모심의 생활은 왜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78-30, 1975.05.01)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모심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본래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모심으로써 우리가 갈 길을 다 가는 것입니다. 믿기는 뭘 믿어요? 모시고 생활함으로써 다 되는 겁니다. 모시는데는 여러분의 생활과 마음으로 더불어 모셔야 됩니다. (150-213, 1961.04.15)

 이제는 개인이면 개인으로서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 가정이면 가정으로서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 교회면 교회로서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 혹은 이 나라 이 민족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심의 기준을 어떻게 새로운 전통으로 설정해 놓느냐 하는 것이 문제됩니다. (38-12, 1971.01.01)

 통일교회시대는 부모님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땅에 임할 수 있고, 하나님이 오실 수 있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시게 될 때 모심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역사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177-157, 1988.05.17)

 모심의 자리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슬퍼해 나오셨던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고 슬픈 정성의 사연에 동참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을 소개하고 그에 따르는 탕감조건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 나온 것이 복귀원리입니다. (17-245, 1967.01.29)

 여러분들은 모심의 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모심의 생활은 왜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먼저 모셔야 됩니다. 하나님을 모셔야 된다는 겁니다. (78-30, 1975.05.01)

② 법도를 어기면 노여워하신다

 하나님을 모시는 데에는 법도가 있습니다. 그 법도를 어길 때에 하나님은 노여워하십니다. (17-287, 1967.02.15)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법도를 지킬 줄 알아야 됩니다. 하늘이 요구하는 천국의 법도를 지키고, 또 천국 법도를 지킬 줄 아는 동시에 천국생활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천국생활을 할 줄 아는 동시에 천국의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1-337, 1956.12.30)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슬퍼하시는 것을 항상 감별하면서 사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되려 해도 될 수 없고, 하늘의 법도에 어긋나려 해도 어긋날 수 없습니다. 그런 남자는 아무리 미인이 유혹하더라도 안 넘어갑니다. 거기에 동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0-297, 1971.02.07)

 오늘날 가정을 탈피하는 불행한 청년 남녀가 많은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천륜의 법도에 일치된 사랑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그 가정에 좌정(座定)시킬 수 있는 천지부모가 현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21-155, 1968.11.17)

 주체를 위한 대상의 자리는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불평하는 것은 망동입니다. 파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은 불평을 불허합니다. 감사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하늘은 언제나 주체로 계시기 때문에 주체와 더불어 상관된 운명을 가지고 그를 이탈하는 생활의 법도, 생활의 형태는 있을 수 없습니다.
(58-310, 1972.06.25)

 천리는 순서를 올바로 지키는 데서 성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 하늘은 절대적인 주체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 주체를 무시하는 사람은 대상이 못됩니다. 절대적인 주체 앞에 절대적인 대상이 되려니 절대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가정에 들어가 사랑하는 것까지도 전부 대상과 주체 입장에 서 가지고 하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일체가 그런 것입니다. 그런 가정은 망하지 않습니다.
(58-310, 1972.06.25)

 최후에 남아질 것은 뭐냐? 하나님 플러스 인간, 신인(神人), 신인의 삶의 길, 신인 생활관입니다. 인생관도 마찬가지로 신인 인생관, 신인 세계관 그것이 막연하게 하나님을 대해 사람이 알 수 있는 정도의 자리가 아니라, 사람이 영원히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자리입니다.
  왜? 하나님과 사람은 본래 떨어져서는 안 될 자리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았어야 할 자리, 그 이상의 자리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신인(神人)이 하나된 생활적인 무대, 세계적인 무대를 요구하고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65-127, 1972.11.05)

 승리적인 주관권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모심의 생활을 중심삼아 일체적인 입장에서 생활해 나가야만 승리적 기대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14-247, 1965.01.01)

 주체를 위한 대상의 자리는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불평은 망동이요, 파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은 불평을 불허합니다. 감사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하늘은 언제나 주체로 계시기 때문에 주체와 더불어 상관된 운명을 가지고 그를 이탈하는 생활의 법도나 형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