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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사랑으로 위해 사는 생활

① 왜 위해 살아야 되는가?

 우주를 만든 하나님, 법도를 세운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우주를 통해 누구보다 위해 사는 대표적인 자리에 선 분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만나려면 위해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지식의 대왕이지만 지식 가지고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능력의 대왕이지만 능력 가지고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권력에 대한, 돈에 대한, 물질에 대한 주인이요, 대왕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위해서 살다오면 전부가 내 곁에 올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133-16, 1984.07.01)

 남을 위해 주고 또 주는 것은, 재창조하는데 있어 하나님이 창조시에 자체를 소모시키던 입장과 일치됩니다. 나를 투입한다는 것은 제2의 나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하나님이 창조할 때 자신을 투입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재창조역사는 탕감복귀노정이고, 탕감은 재창조역사를 통해 하기 때문에, 자신을 투입해야만 재창조가 벌어집니다. 때문에 희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이론적인 결론입니다. (82-240, 1976.01.31)

 하나님은 독재자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위해 투입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앞에 있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년만년 하나님을 따라 가려고 합니다. 위하는 천리의 우주 존재세계 앞에 자기 스스로의 존재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위하는데서만 동서양을 통할 수 있고 고금을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187-89, 1989.01.06)

 자기를 위주해 움직이는 것은 악을 가져 오지만, 전체를 위해 움직이는 것은 발전을 가져 옵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전체를 위해 가는 데는 모든 것이 문을 연다는 겁니다. 개인도 문을 열고, 가정도 문을 열고, 종족도 문을 열고, 민족도 문을 열고, 세계도 문을 열고, 하늘나라도 문을 열고, 모든 것이 문을 열고 환영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인생이 가는 길에 하나의 공리로 세워야 할 것은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나 통할 수 있는 원칙이고 이건 만고불변입니다. 과거-현재-미래가 없기 때문에 위해 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공자님이나 예수님이나 석가모니나 마호메트와 같은 성인이라는 사람 앞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당신들 어떻게 생각하오?' 하면 '그게 옳습니다!' 하겠어요, '옳지 않습니다!' 하겠어요? 그게 우주의 법칙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사는데 있어 참된 모습으로 살 수 있는 하나의 법이다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133-16, 1984.07.01)

 역사적인 전통으로 남길 수 있는 실적은 무엇이냐? 희생정신에 의한 위해서 산 실적만이 오늘날의 세계에 남아져 왔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인으로, 역사적인 위인으로, 혹은 충신으로 남아졌습니다. 그러한 희생정신 밑에서만이 공적이 남아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희생하는 것은 공적을 남기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82-239, 1976.01.31)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전부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뿐만 아니라 왔다 간 과거-현재-미래의 인류를 사랑해주는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에 간 영인들까지 해방해 주는 운동을 하는 하나님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의 길을 가야 되고, 생명의 길을 가야 되고, 사랑의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위하는 기반이 없으면 모든 것이 따라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자연히 주체가 됩니다. 참생명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33-30, 1984.07.01)

 레버런 문 사상이 금후 21세기에 있어 주체사상으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를 위하라!'는 세계에서 반대로 '위해서 살겠다.'는 세계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논리적 관에 있어 그 반대의 세계가 현현할 가망성이 있는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은 통일교회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살겠다는 세계가 아니고 위해서 살겠다는 이 무리의 뒤를 21세기 이후의 수천, 수만 년 세계는 따라 갈 것입니다. 위하라고 하는 세계는 안 따라갑니다. 싫다고 하는 겁니다. (169-88, 1987.10.25)

 어떻게 통일이 되느냐? 선생님은 어떻게 통일하느냐? 주먹으로, 힘으로, 돈으로 권력으로, 지식으로? 아닙니다. 사랑을 중심삼은 위하는 자리에서 만사는 해결되는 겁니다. 결론은 간단하지요? 참사랑을 중심삼고 위해 가는데 있어서 악마의 세계가 하늘나라로 재창조되어 나간다는 결론입니다. 그거 이론적입니다. (182-134, 1988.10.16)

② 위해 사는 자가 중심이다

 우리 통일교회는 잘먹고 잘살면서 가자는 거예요? 못먹고 고생하면서 가자는 거예요? 잘먹고 잘살자는 거예요, 못먹고 고생하자는 거예요? 누구를 위해서요? 통일교회 문선생을 위해서요?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녹여내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42-52, 1971.02.19)

 내가 저 사람을 굴복시키는 방법은 싸워서 이기려 하지 말고, 저 사람을 위해 내가 부모의 자리에서 먼저 생각해 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내가 이긴다라는 겁니다. 3년만 위하면 틀림없이 내 말을 잘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습니다. 자기 안방 문까지 열고 '네 마음대로 우리 집에 들어와도 좋다.' 전부 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한 우주의 원칙적인 작용이 이 본심을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103-139, 1979.02.18)

 하나님의 자리와 부모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먼저 생각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먼저 생각해 주시는 겁니다. 부모는 나보다 먼저 생각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체입니다. 둘이 산다고 할 때, '아, 저 식구가 해야 할 일을 내가 해줘야 되겠다.'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입니다. 그런 사람이 중심입니다. 위해 주는 사람이 센터가 되는 겁니다. (103-139, 1979.02.18)

 상대가 조그만 것으로 나를 사랑하고 위해 주었으면 나는 그 이상의 것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자꾸 확대해 들어가는 겁니다. 확대 확대하면서 시일이 가면, 일생 동안 그러다 보면 이것이 나라를 넘고 세계를 넘고 영원한 세계, 천국을 넘어 천상세계를 넘어간다는 겁니다. (119-326, 1982.09.26)

 사람은 왜 높은 걸 좋아하느냐? 다양한 것과 인연맺을 수 있기 때문에 높은 곳을 좋아합니다. 왜 낮은 걸 싫어하느냐? 단순해진다라는 겁니다. 다양한 관계에서 멀어진다라는 겁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사람은 높은 이상, 높은 관, 높은 것과 관계를 맺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귀한 사람이다 하는 개념을 여기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129-308, 1983.12.01)

 보다 위해야 합니다. 보다 위하는 것이 뭐냐? 보다 위하는 사람이 책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열 사람 가운데 누가 중심이 되느냐 하면, 그 열 사람을 위해 사랑을 하고 위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열 사람이 다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위하는 게 나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중심자가 된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천리가 그렇습니다. 위해 사는 것이 나쁜 줄 알았는데 이것이 센터가 되기 위한 것이요, 책임자가 되기 위한 것이요, 모든 것을 상속받기 위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해 살라고 하는 걸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쁜 게 아닙니다. 손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장사 중에 이런 장사가 없습니다. (132-276, 1984.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