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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선명 선생은 어떤 교육을 받았나

내가 열 살 때 글방 다닐 때는 하루에 책 한 장만 떼면 됩니다. 그래서 30분내에 다 떼는 것입니다. 딱 정신집중해서 하면 30분에 다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훈장 앞에서 외우면 됩니다. 30분만하면 다 외우는데, 하루 종일 ‘공자 왈 맹자 왈’ 하고 앉아 있어요. 그렇게 다 해 놓고는 훈장님이 낮잠 잘 때 나는 산으로 돌아다녔습니다.
옛날에 글방 다닐 때 거기에 훈장이 대개 논어나 맹자 같은 것 몇 장을 강의 받아서 다음날 아침에 반드시 강을 바치게 됩니다. 못 바치면 달초(撻楚·회초리로 종아리를 치는 것)를 받게 됩니다. 하여튼 내가 달초 받던 생각이 나요.
(204-251, 1990.07.11)

옛날에도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학원이 있었습니다. 서울에도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학원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때로 말하면 소학교입니다. 국가가 인정하는 그러한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전 단계로 학원이 있었어요. 그 학원에 가서 공부해서 편입시험을 쳐야 되었어요. 그 학원을 가기 위해서 사촌동생을 충동질해서 혁명을 했습니다. (171-258, 1988.01.02)

4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 아버지는 글방에 훈료(訓料), 학비 같은 것을 다 지불했습니다. 그땐 훈료라고 했어요. 그 월사금(月謝金)을 다 냈는데 1년도 안 돼 도망치려니 어머니 아버지부터 설득해야 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설득하고 할아버지까지 설득한 것입니다. 사촌까지 설득했어요. 남들은 비행기 날리고 있는데 ‘공자 왈, 맹자 왈’ 해 가지고 안 되겠다는 겁니다. 전부 내가 개척했습니다. (203-280, 1990.06.27)

선생님은 욕심이 많습니다. 내가 살아생전에 박사학위 세 개 이상 안 하면 죽는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박사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요즘에는 서로가 무슨 명예박사인지, 진짜 박사학위를 주겠다는 데가 너무 많습니다. (194-294, 1989.10.29)

학원에서 공부한 뒤 그때로 말하면 보통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오산소학교, 여기도 오산학교가 있지요? 그때는 오산보통학교지요. 그 학교의 3학년에 편입시험을 쳐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일년 공부하는데 열심히 안 할 수 없지요. 결사적으로 했더니 성적이 좋아서 5학년으로 월반을 허락받은 것입니다. (211-133, 1990.12.30)

학교 다닐 때는 이십리 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8킬로미터를 매일같이 걸어 다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쯤에 사는 애들은 내가 딱 그 시간에 지나가니까, 그때 나오면 절대 지각 안 합니다. 다 과학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쭉 고개마다 애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참 길을 빨리 걷습니다. 8킬로미터를 한 시간 이내, 45분에 갑니다. 그러면 뒤에서 따라오기가 바쁘지요. (133-155, 1984.07.10)

오산소학교에서는 일본 말을 못 하게 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 원수의 자리에서 투쟁한 대표적 사람인 이승훈 씨가 세운 학교이고 그런 학교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일본 말을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적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적에 대해 세밀히 몰라서는 적과 싸우더라도 대비책을 세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공립보통학교인 정주보통학교에 편입시험을 쳐 4학년에 들어갔습니다. 그래, 거기 들어가서 일본 말을 유창하게 배워서 졸업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신앙길이라든가 인생의 근본문제라든가 어려운 모든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11-133, 1990.12.30)

학교에 가게 되면 전부 일본 말을 배워야 합니다. ‘가타카나’ ‘히라가나’를 공부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하루 저녁에 다 외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벼락같이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의 모든 책을 보름 만에 다 외워 버렸어요. 그리고 나니까 귀가 트였습니다.
첫 번째 그린 그림이 학교에 붙었습니다. 배우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측정해서 그리는 것입니다. 3등분해서 따라 들어가는 거예요. 저 그림이 저 평원에 몇 등분 안에 들어가 있구나 하고 딱 잡아냅니다. 센터를 중심삼고 측정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도화지가 센터를 중심삼고 3배에 점만 치게 되면 그림이 그려집니다.
(171-258, 1988.01.02)

선생님이 어렸을 적에 공책을 쓸 때에는 줄이 쳐진 부분부터 쓰는 것이 아니라 맨 꼭대기부터 썼습니다. 어떤 때는 한 장에 두 번씩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공책 한 권에 더 쓸 수 있습니다. 물건을 아껴 써야 됩니다. (31-259, 1970.06.04)

선생님은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교장 선생의 행동을 보고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훈련을 끊이지 않고 했습니다. 지금도 기도할 때는 그런 것을 중심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25-122, 1969.09.30)

여러분, 호롱불을 알아요? 호롱불 아래에서 공부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두 시, 세 시, 밤을 새워 공부하게 되면 엄마 아빠는 “야! 잠자라. 몸이 너무 약해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늘 그랬어요. 그때 내가 친구 삼았던 것이 밤벌레들이었어요. 여름철엔 밤벌레를 친구로 했습니다. (100-155, 1978.10.09)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은 정주보통학교 졸업식 때 일입니다. 많은 학부형들과 전체 선생들이 축하하기 위해 모였고 정주읍 유지들이 축하하기 위해 다 모였습니다. 그 졸업식에서는 교장의 훈시가 있었고 그 다음에 손님의 축사가 있었는데, 그 다음에 내가 자원해 단상에 올라가서 일본에 대해 반박하던 사실이 잊혀 지지 않아요. 그런 걸 보면 소년시대의 기질이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 식장에서 대웅변을 했습니다. 경찰서장 군수를 앞에 놓고 ‘일본놈들, 보따리 싸 가지고 가라!’ 하면서 성토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 때부터 그렇게 하고 나서 경찰서장한테 붙들려 가서 담판한 사람입니다. “이러이러한 내용이 옳지 못한 데 이런 경우에 가만 있겠느냐?” 이래서 그때부터 낙인이 찍혔습니다.
서울에 처음 오니까 환경이 너무 달랐습니다. 정주는 시골이지요. 그런 환경에서 살다가 도시로 들어오니 180도가 달라요. 또 얼마나 서울의 범위가 넓은 지 모릅니다. 거기에 박자를 맞추면서 지내던 모든 사실들이 생각납니다.
중학교 시절, 청소를 내가 다 했습니다. 전 학교를 내가 선두에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 학교를 대신해서 내가 청소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는 남이 도와주는 거 싫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7년 동안 자취생활 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한 게 아닙니다. 여자들을 알아보려고 그런 것입니다. 절대 더운물 가지고는 자취생활을 안 합니다. 찬물, 그저 두레박으로 찬물을 퍼서 합니다. 그러면 손이 짝짝 붙어요. 이래서 쌀도 씻고 하는 놀음을 많이 해봤어요.
(211-134, 1990.12.30)

습관이 되어 많은 반찬이 필요 없습니다. 언제나 간편하고 맛있고 실용적인 것 하나면 됩니다. 언제나 일식일찬입니다. 맛있는 반찬 한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45-258, 1971.07.04)

나라도 없는 주제에 밥을 세끼 씩이나 다 찾아 먹을 자격이 있느냐고 생각했습니다. 밥이 그리운 생활을 참 많이 했습니다. 밥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민족을 그리워하는 길을 갔습니다. “밥보다 민족을 더 사랑해야지, 나라를 더 사랑해야지” 하면서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 있으면서 점심을 안 먹었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으면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49-71, 1971.10.03)

생일날 금식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자기 개인적 승리의 기준도 못 넘고, 가정적 승리의 기준도 못 넘고, 민족·국가·세계의 승리의 기준도 못 넘은 게 생일 놀이를 해요? 생일 놀이를 어떻게 하겠어요? 춤을 출 수 있어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하늘 앞에 책임을 하고 난 다음에 그런 것을 해야 됩니다. 선생님은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93-278, 1977.06.11)

한강을 건너가다 보면 중지도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서 한강 물을 보고 탄식하던 일이 생생합니다. “너는 천년 만년 흐르건만 얼마나 붉은 마음을 가지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흐르느냐? 생명줄이 될 수 있는 것이 물인데, 이 비옥한 삼천리 강산을 단장할 수 있는 샘, 어머니 젖과 같은 한강수가 돼야 할 텐데…. 너는 못 하더라도 나는 할거야” 하던 것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 때는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리를 걸어다니면서 그렇게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197-74, 1990.01.07)

선생님은 어린애들을 소망의 상대로 여기고 유년 주일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던 명 지도요원이었어요. 그들을 누구보다 사랑했어요. 그 아이들이 선생님한테 미쳤습니다. 학교에도 안 가고 선생님 뒤를 따라다니려고 했어요. (60-197, 1972.08.17)

나는 예수교 박재봉 목사라든가, 이호빈 목사라든가 하는 사람들의 배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배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내 입으로 그 사람들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도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과는 인연이 있어서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백만큼의 인연을 중심삼고 만나게 해주었는데 그것을 오십쯤의 인연으로 끌어내리면 끌어내린 사람이 책임져야 합니다. 일단 그 밭에 심어 놓은 것은 그 밭에서 거두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날은 노트 30장, 한 권 분량의 일기를 썼습니다. 그때 심정의 모든 비장한 사실을 쓴 그 일기가 왜정 때에 사건이 벌어지면서 자료가 됐습니다. 그 기록 가운데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어서 사건 연루자가 되어 줄 연행을 겪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때부터 일기를 안 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첩도 안 가지고 다닙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 머리 속에 기억합니다.
(33-129, 1970.08.11)

일기를 다 내 손으로 불태우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내가 앞으로 이런 길을 가게 될 때 필요한 역사적 자료가, 도탄 중에 신음하는 젊은이들에게 해방의 길을 비춰 줘야 할 기록이 여기 있는데 이걸 태운다’고 하면서 목이 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문 선생은 청춘 시절에 배고픔을 극복하고 민족 구도와 세계 구도와 하나님의 구도를 위해서 노력하던 사람입니다. (197-164, 1990.01.13)

일본에 갈 때 —그 때는 경부선 열차 히카리(光)호가 있었어요— 서울역에서 그 열차를 타면서 “내가 갔다 올 때는 패자의 졸렬한 사나이로 흘러갈 것이 아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한 붉은 마음을 품고 가는 사나이의 길은 하늘이 보호한다. 내가 돌아올 때는 너는 희망에 벅차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197-75, 1990.01.07)

서울에서 부산 갈 때 “내가 일본에 가서 배워 올 것이 뭐냐? 이 나라를 해방시키고, 우리의 2세들이 희망찬 전진적 출세를 할 수 있는 길을, 자주적 독립국가를 세워 출세할 수 있는 길을 닦아 주어야겠다”고 했습니다. 용산역을 떠나 한강 다리를 지나면서 난간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것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199-185, 1990.02.16)

고아와 같은 이 민족을 두고 간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외투를 뒤집어쓰고 통곡하면서 갔습니다. 일본 아주머니가 울고 있는 나를 보고는 “청년,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나요? 그러한 슬픔은 누구나 당하는 것이 아니겠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슬픔은 오직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왔던 것입니다. (39-62, 1971.01.09)

선생님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던 1941년 4월 1일 새벽 2시 부산 부두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일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떠나지만 너를 더욱 더 사랑하고, 너를 위하여 더 많은 눈물을 흘려 주마”고 약속했습니다.
원수의 나라에 가서 발 딛는 그 시간부터 눈물까지 거두었습니다. 거기서부터 내가 갈 길을 정해요. 내가 일본의 명승지를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어요. 나라 없는 백성이 그런 간판 붙은 데는 안 간다는 것입니다.
(22-122, 1969.02.02)

선생님은 전기와 과학을 공부했습니다. 내 갈 길을 알았거든요. 내가 과학 공부를 하면서 벌써 전기 방면에 손을 댄 것은… 큰일을 하려면 수학적 계산이 빨라야 합니다. 감정력(鑑定力)이 빨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보이지 않는 것을 관리하는 것이니 종교와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현상세계에서는 전기 현상이 발견됩니다. 운동하는 모든 것에서 말입니다. (120-316, 1982.10.20)

선생님이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 시내를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다녀 보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장차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몇 년 후에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15-87, 1965.09.29)

학자들은 어떻고, 노동자들은 어떻고 실제 조사하기 위해 선생님은 뒷골목 거리를 많이 다녔습니다. 밀사를 보내고, 다녀왔습니다. 동경 역에 내릴 적부터 싸워 온 것입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내가 다니던 길입니다. “넌 알 것이다, 한민족이 가는 길을”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애국자가 되기를 원치 않아요. 길을 건너가나 오나, 나무를 바라보나 “이 만물, 원수의 땅에 있는 만물, 너는 하늘에 속할 것이거늘 나를 알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녔습니다. (154-163, 1964.06.12)

선생님의 졸업 당시는 대동아전쟁 중이었는데 병역문제도 있고 해서 6개월 단축해 9월 졸업했습니다. (15-147, 1965.10.03)

동경역에 나가 기차를 타려고 하는데 발이 안 떨어집니다. 그 배를 탔으면 가는 거지요. 하늘이 벌써 선생님을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걸 잘 아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뒤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전보를 쳐서 못 간다는 연락도 하지 않고 동무들과 등산을 갔어요. 그때가 가을이었거든요. 후지산으로 갔습니다. 내가 등산을 가는 바람에 며칠이 지나갔어요. 일주일 있다가 돌아왔으니 고향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105-238, 1979.10.26)

고향에서는 큰일났던 것입니다. 아들이 그 배를 타고, 아무 날 몇 시에 온다는데 안 왔으니 큰일이 났거든요. 야단이 벌어졌어요. 평안북도 정주에서는 경찰서에 이틀간이나 들락날락했습니다. (51-236, 1971.11.28)

선생님의 고향 마을에서 정주읍까지는 이십 리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이십 리 길을 맨발로 뛰고,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갔는데, 신이고 옷이고 무엇이고 생각할 정신이 있었겠어요? 아들이 죽었다고 맨발로 뛰어나와 부산 수산경찰서까지 가서 확인을 하니 명단에는 없고, 알 수가 있나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틀림없이 아들이 죽었다고,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다 보니 발바닥에 아카시아 가시가 박혔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곪아터질 때까지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열흘이 지난 후에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아! 내가 너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어머니였습니다. (45-134, 1971.06.24)

선생님은 일본을 떠나오면서 생각했습니다. “20년 후에 내가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니 그때 다시 만나자. 지금은 일본 천황에게 원수를 갚지 못하여 민족의 한을 풀지 못하고 가지만, 앞으로는 너희 나라 백성, 너희 나라 청년들에게 명령하고 가르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다시 만나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20년 만에 일본에 갔습니다. 가자마자 제일 궁금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우리 교회에 청년 남녀들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한 500명이 모였는데 그들이 모두 부잣집 자녀들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모두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일본 천황도 필요 없고, 통일교회와 문 선생이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또 선생님이 명령하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느냐고 물으니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34-349, 1970.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