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다진 인생관
학창시절에 전국을 안 다녀 본 데가 없습니다. 트럭 운전사가 안 태워 줘도 그래도 올라탑니다. 운전석에 못 타면 짐칸에라도 올라탑니다. 트럭을 타고 가서 그 다음날 저녁에 내리면서 내가 저녁을 사겠다고 하면 “그래” 합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한바탕 얘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에 홀딱 넘어가 대신 돈을 꺼내서 자기가 지불합니다. 또 논에서 일하는 자기 남편을 위해 밥을 해서 광주리에 이고 가는 아주머니를 길가에 세워 놓고 이야기를 해서 그 밥을 다 대접받은 사람입니다.
이 길을 나서서 한국의 유명한 목사들, 이름난 목사들을 다 만나 봤습니다. 익었나, 설익었나 다 알아봤습니다. 누가 몇 점 짜리이고, 누구는 몇 점 짜리인지 이미 점을 치고 출발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나를 모릅니다. 겉으로 봐서는 그냥 텁수룩하니 지나가는 길손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그들의 속살을 다 빼어 이미 하늘 보고서에 기록하고 나섰습니다. (62-54, 1972.09.10)
선생님은 먼저 지하교회를 편답했습니다. 일본에 신사참배한 더럽혀진 사람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해방 3년 전부터, 그러니까 스물 세 살부터 지하교회 편답을 시작한 것입니다. (211-142, 1990.12.30)
내가 뜨개질을 참 잘합니다. 스웨터 같은 것도 혼자 다 만들어 입었어요. 버선 같은 것도 잘 만들었습니다. 팬티나 베잠방이 같은 것도 혼자 잘 만들었어요. 여자 없이 혼자 살겠다고 모든 것을 연구한 사람입니다. 일생 동안 독신생활 하더라도 이 뜻을 필생의 사업으로 작정하고 나선 사람이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쁜 모자를 떠서 쓸 수 있습니다. 장갑을 떠도 참 빨리 떴습니다.
여자 옷을 입고 서울 장안을 안 다녀 본 데가 없습니다. 남자 녀석들을 전부 다 골려 먹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암행어사가 돼야 해요. 세상을 조사하려면 샅샅이 해야 돼요. 그런 역사가 많습니다. (50-291, 1971.11.08)
청소년 때에는 얼마나 극장에 가 보고 싶었던지…. 우리 같은 사람이 영화를 보게 되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기질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난 절대 안 갑니다. 선생님이 그래서 “그거 뭐 본래부터 안 가는 것보다 자꾸 매일 같이 가자”고 해서 하루에 영화를 다섯 번까지 봤습니다. 그곳에 안 가면 될 것이 아니라 제일 많이 가 보면서, 제일 상극이 될 수 있는 체험을 하고는 안 가는 것입니다. 그거 체험도 못 하고 안 가면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다섯 번씩 다니다가 딱 끊어 버렸습니다. “이놈의 자식들아, 안 간다” 하는 것입니다. (123-242, 1983.01.02)
옛날에는 종로 3가 같은 데는 유곽이 있었습니다. 그걸 내가 조사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왜 예쁜 여자들이 저 놀음을 해야 되느냐는 거예요. 저게 만약에 자기 누이라면 어떡할 거야? 자기 딸이라면 어떡할 거야? 아버지가 되어서, 오빠가 되어서 어떡할 거야?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런 젊은 여자들을 대해 밤을 새워서 얘기해 주던 생각이 납니다. (182-167, 1988.10.16)
흑석동에 있을 때 시내에 들어오려면 전차비가 5전이었어요. 5전을 주면 전차 타고 시내에 갑니다. 그렇지만 시내까지 걸어갔어요. 화신까지 45분이면 갔습니다. 빨리 걷는 사람이지요. 보통사람은 한 시간 반 걸립니다. 여름날 학생복을 입고 땀을 흘리면서 걸어다녔어요. 그 돈은 불쌍한 사람에게 준 것입니다. “천만금을 주고 싶고, 여러분에게 복지를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지금 민족을 대신해서 주노니 이것을 받아 부디 복의 씨가 되시오” 했습니다. (184-246, 1989.01.01)
노량진에 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학교까지 5전이면 전차를 타는데 전차를 타지 않고 그 5전을 넣어 가지고 걸어오다가 내리는 곳쯤에서 적선하고, 갈 때는 노량진에서 적선하고 그렇게 하면서 다녔어요. 그러고 다니면서 “내가 큰소리할 때까지 잘 자라라. 죽지 말고 나와 더불어 크자”고 하면서 나무를 치고 다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 그 플라타너스가 다 없어졌습니다. (197-74, 1990.01.07)
고향에서 보내온 학비를 가지고 학교로 올라가던 도중 길가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를 만나, 그 환자에게 돈을 주고 입원시켜서 치료해 돌려보낸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금을 내지 못해 독촉받던 생각, 그 때 친구들이 동정해 준 일들은 일생 동안 잊혀 지지 않습니다. 그런 한때의 일이 선생님의 일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압니다. (90-251, 1977.01.03)
하얼빈 위에 하일라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부터 만주전업이라고 하는 전기회사에 취직해서 살려고 했습니다. 거기에 가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느냐? 소련 말을 배우고 중국 말을 배우고 몽골 말을 배우려고 그랬습니다. 아시아에서의 대륙기지를 앞으로 요리할 것을 생각하고 말을 배우기 위해서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3년 동안을 계획했습니다.
만주 안동현에 만주전업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그 지점에 가려고 가만 보니까 정세가 편안하지가 않아요. 만주에 가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동에 취직해서 받은 모든 것을 반환하려고 갔습니다. 사표까지 첨부하고 비용을 다 가지고 안동에 가서 지점장을 만나 청산지었습니다. (186-317, 1989.02.06)
선생님도 옛날에는 직장에 가더라도 제일 일찍 가고 제일 늦게까지 일했습니다. 그런 훈련을 했습니다. 일등 안 하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제일 귀한 자리에 나가고 인계자,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뜻을 대해서도 새벽같이 일어나고 일생을 이러는 사람이 주인이 됩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99-45, 1978.08.27)
선생님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일본 동경에 가면 긴자(銀座)라는 번화가가 있습니다. 그 거리는 선남선녀들이 아주 잘 차려 입고 다니는, 일본에서 제일 번화한 곳인데, 선생님이 학생복을 벗어 던지고 전신주를 실은 짐수레를 끌고 가면서 ‘너 이 녀석들 길을 내주나, 안 내주나 보자’는 생각을 하고 일한 적이 있습니다.
가와사키(川崎) 조선소에는 ‘바지’라고 하는 석탄 싣고 다니는 통통선이 있습니다. 그 120톤 되는 석탄을 세 사람이 도맡아서 하면 밤 한 시까지 일을 끝내야 합니다. 남들은 사흘 걸리는 일을 한 시까지 끝냈습니다. (37-37, 1970.12.22)
휴일에는 가와사키에 있는 회사에 자주 갔어요. 거기에는 유산 탱크가 있는데, 노동자가 그 유산 탱크 속에 들어가 정화하기 위해 원료를 내려보냅니다. 그 장치는 몇 년간 쓰면 못 쓰게 되어 버립니다. 유산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교환하기 위하여 탱크 속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는 15분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 싸우면서 일했습니다. (15-181, 1965.10.08)
일본 유학시절 선생님은 빈민굴에서부터 사창굴에 이르기까지 안 가 본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행동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22-119, 1969.02.02)
수양할 때 조용하고 장엄한 곳이나 깊은 산과 같은 곳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조용한 곳에서만 공부가 된다는 것은 선생님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공장의 몇 백만 마력의 모터나 엔진이 돌아가는 곳에서도 공부합니다. 그런 일을 잘 합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15-131, 1965.10.03)
선생님 뒤에는 언제나 형사들이 따라다녔습니다. 내가 한국에 나오면 그들이 미리 전화해서 아무개가 지금 한국 어디에 간다고 연락합니다. 선생님이 정거장 개찰구를 나오면 원치 않는 사람들이 와서 인사합니다. (34-286, 1970.09.13)
학생이었지만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통사람은 선생님을 잘 모릅니다. 한국이 일본 정권 하에 있었을 때, 선생님은 몇 번이나 유치장에 끌려갔습니다. 도쿄(東京)에 있을 때에는 한 달에 한 번은 경찰서에 불려 갔습니다. 그 경찰서는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 거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오른편에 있었습니다.
일본에는 식권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식권으로 “몇 그릇이나 먹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먹어 보자” 해서 친구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다카다노바바를 쭉 내려가면 절이 있는데, 거기서부터 식당이 쭉 늘어서 있어요. 선생님은 닭고기 계란덮밥을 일곱 그릇이나 먹었습니다. 일곱 그릇 먹고 나서는 목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배가 고픈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자신의 배 만을 채우고 있으면 자신으로부터 민족이 멀리 도망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자기에게서 멀리 달아나 버립니다. 배가 고파서 먹고 싶지만, 그 이상으로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진리이며, 선생님의 신조였습니다. (15-182, 1965.10.08)
4년 동안 2식 주의(二食主義)를 실행하십시오. 선생님은 30세까지, 고등학교 시절부터 2식 주의를 실천했습니다. 세 끼를 안 먹고 살았어요. 그래서 배고프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밥 한 끼를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그건 거룩한 일입니다. (185-111, 1989.01.03)
선생님은 헌 옷가게에서 싼 옷들을 사 입었습니다. 그 옷을 보면 반들반들 윤이 납니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는 포마드라든가 무엇인가를 바릅니다. 바람이 불거나 태풍이 불면 머리카락이 날리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바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봄날이나 여름날에도 바르지 않았습니다. 또 걸을 때에는 밑에서부터 45도 이상 위를 보지 않았습니다. (15-182, 1965.10.08)
천명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나이가 어찌 뻔뻔스럽게 갖출 것을 다 갖추어 대로를 활보하며 다닐 수 있느냐 하면서 나왔습니다. 천리의 공법 앞에 치러야 할 대가를 청산하지 못한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7-35, 1970.12.22)
여자들이 벌거벗고 이불 속으로 몰래 들어오는 것을 여러 번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일본 여성들 앞에 죄를 안 지었습니다. (231-38, 1992.05.31)
자기의 성욕을 컨트롤해야 됩니다. 미인들 틈에 들어가더라도 생식기가 일어나서는 안 돼요. 컨트롤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뿌리가 깊다는 걸 알고 그 뿌리에 여러분들이 접을 붙여서 자라야 푸른 동산에서 선생님 같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182-175, 1988.10.16)
학생 때에도 감옥 출입을 보통으로 한 사람입니다. 또 일본 경찰의 고문대에서 뱃심도 부려 본 사람입니다. 그들의 고문은 아주 지독했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그때처럼 고문하면 옷에 똥을 싸면서 하지 않은 것도 했다고 할 것입니다. (25-161, 1969.10.03)
사지에 죽은 피가 돌만큼, 또 피가 몇 사발 쏟아질 만큼 매도 많이 맞아 봤습니다. 왜정시대에는 군화 발에 배를 얻어맞는 고문도 당했습니다. 두 녀석은 좌우에서 손을 잡고, 또 두 녀석은 위에서 밟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뱃가죽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변소에 가서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 보세요. 그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17-295, 1967.02.15)
선생님이 왜정 때 일본 천황의 모가지를 떼겠다고 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일 힘든 것은 각목을 갖다 여기에 놓고 고문을 받는 것입니다. 왜정 때는 군대에서 신는 가죽구두가 있었습니다. 징을 박아 짜박짜박하는 가죽구두로 밟습니다. 그건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63-213, 1972.10.14)
한번은 열네 시간 취조를 당하고 고문을 당하여 20미터를 기어서 가지 못할 만큼 되었고, 몇 번씩 죽었다 깨어나는 과정이 반복 되었어도 나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나는 20대에 하나님 앞에 이 민족을 구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일본 국민이 천황을 위하는 마음보다 내가 삼천만을 대신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망한다고 믿었습니다. 일본이 선을 먼저 쳤으니까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3-115, 1970.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