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선명 선생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나
선생님이 태어난 1920년대의 한국은 3년 흉년이 들고 해서 지극히 어려운 때였습니다. 또한 3·1운동을 중심삼고 일본에 대해 반기를 들고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던 때였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에 선생님이 태어났습니다. 선생님 일가가 독립만세 사건을 중심삼고 시련을 겪던 그 터전 위에서 선생님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161-68, 1987.01.02)
선생님이 태어난 1920년은 일제 식민 치하였습니다. 선생님은 강대국에 짓밟히는 약소민족의 고통과 슬픔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청소년 시절에는 비참한 전쟁과 죄악의 세계를 구원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 가문에는 배고픈 사람은 절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손님이 찾아올 때는 절대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풍이 있습니다. 그래서 팔도강산의 숱한 사람들에게 밥을 먹여 보냈습니다. 왜정 때 일본 사람이 착취하면서 못살게 되자 만주로 피난을 갔습니다. 우리 집이 길가에 있기 때문에 팔도의 수많은 사람이 들러서 밥을 먹고 갔습니다. 어머니가 매일 삼사십 명씩 밥을 해먹이는 것입니다. 일생 동안 그러면서도 불평 한마디 안 했습니다. (229-79, 1992.04.10)
우리 집이 국도 옆에 있었습니다. “아무 동네 문씨 할아버지 집에 가보라”고 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사랑방에 한 30명이 모여들었던 적도 있어요. 우리 어머니가 대단한 성격인데도 시아버지를 모시고 일생 동안 밥 하고 땀 흘리면서도 불평 한마디 안 했습니다. (198-149, 1990.01.28)
우리 할아버지 3형제분이 있었는데 막내 할아버지(문윤국·文潤國) 되는 분은 목사였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3·1운동 당시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있으면서 전국 책임자들과 내적인 계획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오산학교 직원과 교회 신도, 오산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때 주모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당함으로써 옥고의 생활을 2년 동안 했습니다. 옥고에서 풀려 나왔어도 편안하게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일생 동안 타향살이를 하였습니다. 일경의 박해로 피신 다니다가 강원도 정선에서 생애를 마쳤던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문경유·文慶裕)로 말하면 법이 없어도 사실 분이었습니다. 만일 아버지가 어디서 바쁘게 빚을 얻어 왔을 경우, 그 빚을 갚는다고 약속한 날에 이자까지 갚아 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분이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약속을 이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을 수행하는 데 모범적인 분이었습니다. (45-134, 1971.06.24)
우리 아버지는 400페이지 되는 찬송가를 암송하기 때문에 교회에 갈 때 안 가져갑니다. “아버지, 왜 안 가져가요?”하고 물으면 “그것 가지고 다니면 귀찮은데 뭘 가지고 다녀? 잃어버리고 그럴 텐데 놓고 다니지!”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찬송을 불러요?” 하면 “어떻게 부르다니? 남이 부를 때 따라 하면 되고, 모를 땐 내 앞에 선 사람 것을 보고 부르면 되지” 하면서 찬송가를 머리에 다 집어넣어 버립니다.
어머니(김경계·金慶繼)는 여장부입니다, 여장부. 대 한량입니다. 한량이라는 말은 좀 나쁘지만 말입니다. 내가 어머니를 닮았어요. 앞뒤가 두리둥실하거든요. 납작하지 않습니다. 옆으로 쓱 보면 말입니다. 어머니는 힘이 장사였습니다. (139-52, 1986.01.26)
선생님 자신, 또 지금까지 선생님의 가정이 생활해 나온 것을 쭉 되돌아보면 하나님은 어느 한 때에는 축복을 해주시지만 모질고 무자비하십니다. 선생님의 가정은 증조부 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때에 와서 탕감을 받았습니다. 축복받은 후에는 반드시 탕감의 역사가 벌어집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축복받은 후에는 반드시 탕감을 받았습니다. 열 개만한 축복을 받았으면 반드시 그만큼 탕감을 받아야 됩니다. 어떤 것을 지탱시키고, 그 씨를 남기기 위해서는 탕감을 받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가정을 위한 씨가 아니라 종족을 위한 씨를 남기려면 그 가정에 축복 이상의 시련을 사탄이 퍼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선생님 가정에 상당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가산이 탕진되었고, 인명 피해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이 뜻을 찾아 나올 때까지 그 배후에는 3대에 해당하는 탕감의 인연이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대에서도 탕감을 받았고, 아버지 대에서도 탕감을 받았고, 내 대에서 형님까지 탕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