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양심이 가르치는 곳으로 가라
악이 가는 길에는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교육을 받지 않고도 누구든지 갈 수 있습니다. 악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이기 때문에 교육을 받지 않고도 누구든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의 길을 가게끔 교육할 필요성이 있어요? 스스로 그렇게 됐기 때문에 오늘날 인륜도덕을 중심삼고 양심의 표준 앞에 가려 가라고 교육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중심한 교육이냐? 선을 중심삼고, 양심을 중심삼고 교육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교육의 표준에 입각한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악한 것은 배우지 않고도 누구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다 만점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6-57, 1970.11.15)
고집부리는 사람도 자신의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마음은 자신이 잘하는지 못하는지 다 압니다. 그러기에 마음세계에는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마음세계는 자기가 해 놓은 일에 대해서 잘했는지 못했는지 다 압니다.
그런데도 떼를 쓰며 고집을 부리게 될 때에는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는 사탄 상속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독사가 와서 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사가 물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겠어요? 그러나 그것은 독사에게 물리는 것보다 더 무섭습니다. 독사에게 물리면 자기 일대만 망하지만 마음세계가 잘못되면 수천만 대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37-132, 1970.12.23)
여러분, 마음을 누가 교육합니까? “나는 마음 소학교 다녔소. 나는 마음 중학교 다녔소” 하는 말을 들어 봤습니까? 이것은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절대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법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마음 이상의 도리를 가르쳐 줄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사람은 좋지 않은 일을 하게 되면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양심은 바른 것입니다. 대개 관념이 그렇습니다. 양심이 꼬부라졌느냐 반듯하냐 할 때, 양심이 꼬부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보편적으로 양심은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38-228, 1971.01.08)
악에 교육이 필요한가요, 필요하지 않은가요? 악하게 만드는 데는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면 자연히 악한 사람이 됩니다.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하면 틀림없이 악한 사람이 됩니다. 선한 사람이 되려고 생각지도 못합니다. 틀림없이 악한 사람이 됩니다. (38-301, 1971.01.08)
악한 사람이 되는 데에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교육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악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대번에 악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이 되라고 교육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한 사람이 되려면 자동적으로 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즉 선을 따라 행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가는 길은 서로 상반된 길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기 위해 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을 쉽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39-23, 1971.01.09)
악을 행하는 데는 교육도 필요 없고 제재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당장 뛰쳐나가도 세계에서 일등 가는 악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길가에 서서 사람이 올 때 칼로 찔러 버리면 그렇게 됩니다.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한다면 천하라도 다 베어 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되는 데에는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두어도 얼마든지 악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제재와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것 자체가 뭐냐 하면 악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39-267, 1971.01.15)
본심은 압니다. 본심에는 설명이 필요 없어요. 자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건 위대한 것입니다. 본심에는 교육이 필요 없어요. 리더가 필요 없습니다. 자동으로 아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자석같이 N극과 S극이 자동적으로 수수작용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주는 데에서 자동적으로 참으로 받는 힘이 결합되어 거기에서 우주적인 존재 분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를 자연이라고 합니다. (147-141, 1986.09.07)
여러분이 본연의 인간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중심입니다. 마음은 하늘 종적인 부모를 이어받아 태어났는데, 종적인 부모를 통해서 태어난 마음은 횡적인 부모를 통해서 태어난 몸과 하나돼야 합니다. 어디서? 90각도에서 하나되게 될 때 하나님이 누구인지, 뭐 지옥이 어디에 있는지, 천지천하가 다 보입니다. 교육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187-117, 1989.02.05)
양심은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수직이기 때문입니다. 수직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은 단 하나 한 점밖에 없고 위에도 한 점밖에 없어요. 그 다음엔 수평이 완전히 돼 있으면 수평이란 존재를 교육할 수 있어요? “너 이렇게 고쳐라. 저렇게 맞춰라” 할 수 있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나 수평을 교육할 수 있다” 하는 사람 손 들어 보세요. 그건 미친 녀석이지요. 그것은 영원히 영원히, 수평 하게 되면 벌써 영원한 불변의 틀로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수직도 마찬가지입니다. (211-233, 1990.12.30)
양심이 몸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당했습니까? 일생 동안 유린당하는 양심의 사정을 여러분은 알아요? 밤이나 낮이나 나를 관리하기에 피곤한 것이 양심입니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몸이 나쁜 행동을 하려 하면 막는 것입니다. “그만큼 했으면 이제 그만두어야 할 것 아니냐? 내 말 좀 들어야 될 것 아니냐?” 그렇게 하지요? 자기 앞에 제일 가까운 부모 대신, 하나님 대신, 스승 대신의 존재가 양심입니다. 마음 자체에게는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몸뚱이에게는 교육이 절대 필요합니다. (214-277, 1991.02.03)
우리의 양심세계와 몸을 두고 보면 어떻게 되어 있느냐? 양심은 교육을 받지 않아도 모든 선한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섯 나라가 있다면 다섯 나라의 주권자들이 서로 다르게 헌법을 만들어서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결론지어 그것에 따라서 치리한다고 하더라도, 양심적인 사람은 그 다섯 나라의 주권자들 가운데 어느 주권자가 더 선한 주권자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가 1등인가를 측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섯 나라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고르고 제일 나쁜 것을 고를 수 있습니다. 양심은 그런 것을 판단할 줄 알기 때문에 그 다섯 나라 가운데 제일 선한 편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겠어요? 양심을 교육하는 것이 목적이겠어요, 몸뚱이를 교육시키는 것이 목적이겠어요? 양심은 다섯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가 선한가 악한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자기 주체성을 지니고 나를 관리하고 있는데, 몸뚱이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니까 몸뚱이를 치리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양심은 이미 주체성을 지녀 영원히 자리잡고 있는데 무슨 교육이 필요해요? 벌써 좋은 사람을 대하면 마음이 압니다. 한 번 대하고, 두 번 대하고, 세 번만 대하면 아는 것입니다. “아, 그와 하나되고 싶다!” 합니다.
그래, 몸과 마음은 하나되는 것이 어때요? 몸과 마음이 싸우게 되면 양심세계는 싫어합니다. 양심이 그런 변하지 않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영계가 양심을 터전으로 해서 활동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타당합니다.
계시를 받는다든가 하는 경우와 같이 영계에 접하게 될 때는 어떻게 되어 있어야 하느냐? 그것이 수평이 되어 요동이 없어야만 영계가 자연히 연결되는 것입니다. 몸뚱이 가지고는 안 됩니다. (216-306, 1991.04.15)
여러분은 양심과 육신의 이중성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어떤 때는 양심과 육신이 반대하고 싫어하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되지 못하고 계속 부딪칩니다.
양심과 육신이 통일해서 하나되지 못하면 이상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볼 때도 지금까지 이 전쟁을 멈추게 한 것은 없었습니다. 교육으로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247-14, 1993.04.21)
양심은 양친부모보다 낫습니다. 아무에게도 묻지 말라, 부모가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부모의 생활방식이라든가 가르침이 필요 없습니다. 양심은 교육할 필요가 없습니다. 양심을 교육한다는 이야기 들어 봤어요? 양심은 교육을 초월해 있습니다. 국가법을 넘는 절대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양심은 양친보다 낫다! 양심은 선생님보다 낫다! 선생님이 필요 없습니다. 양심에게는 교육이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런 위대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보다 낫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을 잇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에 연결된 경우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일체가 되어 있습니다. (252-153, 1993.12.29)
절대적인 양심은 절대적인 하나님 자리입니다. 하나님한테 물어 볼 필요 없습니다. 양심을 대해서 교육하는 사람 봤어요? 부모가 양심을 대해서 명령할 수 없습니다. 몸뚱이가 잘못했기 때문에 부모의 간섭을 받지, 양심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부모보다 앞서 있는 것입니다.
제2 하나님이기 때문에 양심은 부모보다 앞서 있습니다. 양심은 스승을 앞서는 거예요. 스승한테 물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한테 물어 볼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양심에 대해 교육하지 않아요. 다 가르쳐 줬습니다. 양심을 절대시해야 합니다. 절대시하지 않고는 몸 마음을 하나 만들 길이 영원히 없습니다. (252-256, 1994.01.01)
양심은 제2의 하나님입니다. 양심을 교육하겠다는 사람 봤어요? 양심을 교육하겠다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어느 누구나 만나서 당신은 양심적이냐고 묻습니다. 외교무대에서도 양심적인 외교관이냐를 묻고, 정치하는데도 양심을 중심삼고 묻습니다. 경제인도 양심적이냐를 묻습니다. (256-201, 1994.03.13)
“양심은 부모보다 낫다” 커다란 소리로 말하면서 쓰세요. 잊지 않도록 빨간 선을 세 번이라도 백 번이라도 그으세요. 잊으면 안 됩니다. 어머니와, 부모와 상담할 필요 없습니다. 자신은 백퍼센트 알고 있습니다. 양심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양심에는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영원히. 알겠습니까? (257-116, 1994.03.13)
우리 양심만이 (3대) 주체사상을 달성할 대상의 자리에서 절대 일체가 되어야 하므로, 양심의 위치는 우리를 낳아 준 부모보다, 스승보다, 어떤 나라의 왕보다 나은 자리에 서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양심은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대신 절대 모셔야 합니다. (259-41, 1994.03.27)
“양심적인 인사는 양심 만능권을 주장하고, 양심 해방권을 부여해 만세의 승자가 될지어다! 아멘!” 할 수 있는 만국만 되면, 양심을 하나님보다도, 자기 부모보다, 그 나라의 무엇보다 가치 있게 존중할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양심 해방을 받은 사람들이 천하를 지배할 때가 옵니다.
그래서 요즘에 가르치는 것이 양심은 부모보다 앞서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시집 장가가서 자기가 어려움이 있으면 갈라질 수 있지만, 양심은 나와 더불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부모의 사랑 이상의 사랑을 가지고 천상세계로 환고향하는 길에 안내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스승보다 앞서 있습니다. 양심세계는 교육이 필요 없어요. 오늘날 세계에서 교육부 장관이 양심을 교육하자고 선포했다는 말을 들어 봤어요? 양심은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양심은 내 갈 길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양심에 상충되게 될 때는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지옥 가는 길입니다. 양심은 스승보다 앞서 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보다 앞서 있습니다. 왜? 사랑하는 상대는 자기보다 높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266-277, 1995.01.01)
양심은 부모보다 앞서 있습니다. 양심은 스승보다 앞서 있습니다. 양심은 주인보다 앞서 있다 이거예요. 부모나 스승과 주인은 갈라져 살 수 있습니다. 양심은 갈라질 수 없습니다. 영원히 갈라지질 않아요. 그 양심의 마음, 양심이 하라는 대로 하면 완전히 하나님의 직계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과 오후가 되면 그림자가 생기지만 오정(午正)이 되면 그림자가 없어져요.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림자가 없으니 이 자리에 들어가면 하나가 됩니다. 본체와 이퀄이 되어야 그림자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291-184, 1998.03.11)
양심은 스승보다 앞섭니다. 양심을 붙들고 교육하자는 교육부 장관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양심은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본성의 양심은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자신이 생애의 이상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게끔 돼 있는데, 육신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절연관계가 되어 있어 방해하고 있으므로 불가능하게 돼 버린 거예요. 양심은 스승보다 먼저입니다. (298-181, 1999.01.01)
자신의 교육에 의해 그렇게 알게 되면, 선생님보다 먼저 양심에 물었을 때, 진리인가 아닌가 금방 압니다. 자신이 정착해야 될 영원한 세계의 주인을 맞이해야 할 그런 입장에 서든가, 그 이상의 입장에 설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주인권 왕권 이상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그 나라의 가르침이 훌륭해도 그 나라에 있고 싶지 않은 거예요. (393-73, 2002.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