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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향과 본향

1) 아버님의 고향회고 말씀과 기도

오늘 말씀드릴 제목은 '고향'입니다. 고향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187-283, 1989.02.12)

나라를 생각하며 괴로워한 젊은 시절

아마 인간은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이가 젊었을 때는 고향을 떠나고 싶어합니다. 나도 이제 칠십이 되어서 옛날 어렸을 적부터 철들어 가지고 생각한 것 등 모든 과거의 일들을 생각해 볼 때, 그때는 대한민국의 8도, 물론 그때는 13도였지만, 13도 가운데 함경도가 어떻게 생기고, 평안남도가 어떻게 생기고, 황해도가 어떻게 생기고, 그다음엔 강원도로부터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가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것이 궁금했습니다. 그건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20대 전후해서 전국을 돌던 일이 회상됩니다.
그때에 느끼던 모든 것이, 간절히 바랐으면 바랄 수 있는 상대적 나라- 자기 나라-에 대한 것을 보고 느끼게 될 적에 그 고향이, 그 나라가 행복하고 평안했더라면 그렇게 인상적인 것이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어렵게 사는 마을 마을을 거치고, 혹은 산야를 넘나들면서 느꼈던 것이 '이 불쌍한 민족' 그런 거였어요. 그런 생각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우리 인간은 몸을 갖고 있고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의 고향과 마음의 고향이 다를 수 있느냐? 같아야 된다 할 때에 영원한 내 마음의 고향이 어디냐 이거예요.
여러분이 고향이라는 걸 생각하지만, 나도 고향 떠난 지 벌써 수십 년 됩니다. 혹은 외지로 돌아다니고, 혹은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 내가 감옥살이할 때 감옥 창살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볼 때마다 심각했어요. 미국 형무소, 한국 형무소, 공산당 형무소에서 말이예요. 나는 일본 형무소까지 다 알고 있는 사람이예요. 그 햇빛이 같은 햇빛이지만 옥중에 전해 주는 햇빛은 그 내용이 심각한 것입니다. 거기는 한국을 눈물로 그리게 되고, 그다음엔 또 아시아를, 동양을 눈물로 그리게 되는 거예요.
일본이 옛날에는 우리의 원수였지만 감옥에 들어와서 일본 사람을 만나게 될 때는, 이건 누구보다도 더 가까운 걸 느낄 수 있더라 이거예요. 이런 걸 보면 먼 거리에서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가까운 거리의 원수는 원수가 아닌 것을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치문제를 논할 때에 우리는 흔히 '그 사람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자기 고향에서만 살아 가지고는 고향이 귀한걸 몰라요. 또 대한민국에서만 살아 가지고는 대한민국이 귀한 걸 몰라요. 아시아를 거치고 세계를 거쳐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떨어지는 거리의 비례에 의해서, 또 시간에 비례해 가지고 고국을 떠나 온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간절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사람은 물론 한군데 정착해서 살아야 되겠지만 정착한 기지를 중심삼고 동서남북으로 확대하면서, 인연을 가누면서 살고자 하는 것도 인간 생애를 엮어가는 군상이 아니겠느냐?
(187-283, 1989.02.12)

부모는 슬픔과 기쁨의 동반자

고향은 어떤 곳이냐? 고향은 그래요. 내가 이제까지 쭉 이렇게 지내고 보니까, 내가 자랄 때의 일들,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배울 수 있는 것의 80퍼센트 이상을 가르쳐 준 교재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은 간단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누구나 다 있는 어머니 아버지이지만 그 어머니 아버지를 대하는 입장에 따라서 천태만상의 가치 기준이 설정되는 것입니다. 내가 슬플 때의 어머니 아버지는 나에게 있어 위로의 어머니 아버지, 기쁠 때의 어머니 아버지는 더더욱 자극시켜 주는 어머니 아버지…. 아들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슬퍼하는 부모는 없어요. 그런 걸 볼 때, 슬플 때에 같이 동반자가 되고 기쁠 때에 같이 동반자가 되어서 내가 철이 들 때까지 먹고 사는 일체를 보살펴 주는 주체자로서 나의 동반자가 아니었더냐?
내가 외로우면 외로운 것을 위로하고, 어려우면 어려운 것을 위로하고, 병이 나면 병이 난 것을 전부 염려해 주고 위로해 주느니만큼, 내가 철이 날 때까지 자라는 데 있어서 나의 모든 심신을 중심삼은 동반자가 아니었더냐? 그 동반자가 변하면 곤란하다는 거예요. 동반자로서 영원까지 변하지 않을 수 있는 입장에 선 것이 부모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를 중심삼고, 변하지 않는 부모를 좋은 곳이 있으면 거기에 모시고 가고 싶은 것입니다. 빙빙 돌아다녀 보다가 그 가운데 좋은 곳이 있으면 어머니 아버지와 더불어, 세계만방에 아무리 멀리 가 있더라도 그 가운데 좋은 곳이 있으면 그 좋은 곳을 나만이 갖고 싶은 게 아니라 동반자 되는 부모와 더불어 나누고 싶다는 거예요.
어째서 그러냐? 부모는 내 마음과 몸의 변치 않는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외로울 때 외로움 가운데 있는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최대의 동반자가 부모요, 내가 기쁠 때 그 기쁨을 같이 찬양할 수 있는 친구 이상의 최대의 동반자가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변치 않는 동반자가 있는 곳을 중심삼고 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결론도 나와요.
그러면 고향에는 누가 있느냐? 부모가 있습니다. 또 부모 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는 다릅니다. 누가 가까우냐 하고 묻게 될 때, 철모를 때는 어머니 아버지가 가깝다고 보지만 오랜 역사를 두고 보면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누구의 보호를 받았느냐 하고 추구해 볼 때, 내가 어머니 아버지를 중심삼고 변치 않는 주체자로서 그리움을 갖는 거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아버지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중심삼고 그렇다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종지조상(宗之祖上) 은 어떤 분이냐? 우리 조상이 있는데 그 가운데 맨 중심에 설 자는 누구냐 할 때, 우리 인간의 근본되는 조상이 아니겠느냐? 그 조상의 조상이 있었다면 그 조상이 부모로서 모실 수 있었던 그분이 아니겠느냐? 그런 분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요, 우리 아버지라 할 때 우리 부모의 마음을 영원히 끌어당길 수 있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을 영원히 끌어당길 수 있고, 수많은 조상들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묶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187-288, 1989.02.12)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심은 불가피한 것

사람은 아무리 멀더라도 근본을 떠날 수 없습니다. 변치 않는 심정적, 정서적인 근본을 떠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뿌리가 거기서 퍼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넘어설 존재가 없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심(向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이 좋고 나쁘고, 잘생기고 못난 게 문제가 아니라구요. 좋고 나쁜 것을 떠나서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어디 해외에 나가든가 먼 세계로 떠나면 떠날수록 거기에 있을 때 비가 온다 하면, 그 비는 똑같아요. 비 오는 현상은 마찬가지이지만 그 비를 대하는 내 마음은 고향과의 거리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예요. 또 환경의 여건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혹은 친구와 만난다거나 누구 사랑하는 사람들과 동반해서 거기에서 산다 하더라도 고향을 떠났을 때는 자기 아내도 나와 같이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동반해 가지고 거기 가서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거예요. 또 자기 아내뿐만 아니라 아들딸도 고향에 데려가서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해 두었던 추억들을 나누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고향이라는 것은 내 삶에 있어서 중요한 교육의 재료를 80퍼센트 이상 공급하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서 고향과의 인연을 끊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학교를 가더라도 유치원 시대, 소학교 시대, 국민학교 시대, 그다음 중고등학교 시대, 그다음 대학, 그다음엔 사회에 나가 출세해서 성공한 시대, 이런 걸 보면 고향을 떠나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고향과 멀어지는 것 같지만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마음 가운데 제일 잊혀지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 유치원 시대라는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유치원에 가서 선생님들과 노래하고 춤추던 것이 국민학교 다닐 적 것보다 철이 든 다음에 회상하면 더 강하다는 거예요. 중학교보다 국민학교 고등 학교보다도 중학교, 대학교보다도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더 강하다는 겁니다.
전부 다 생각이 가정을 중심삼고 어머니 아버지 형제를 생각하는데, 이것이 대학을 나와 점점 커 가면서 철이 들면 들수록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내가 무엇이 돼야 되겠다' 하는 것을 중심삼고 바깥으로 나가려 한다는 겁니다.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면 이것이 한 센터를 중심삼고 360도로 보게 될 때, 이 간격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 거예요. 십리 간 거하고 백리 간 거하고 가서 보게 된다면 처음의 1도 차이라는 것은 무한하다 이거예요, 이렇게 갔던 사람들을 그냥 놔두면 떠나버릴 겁니다.
그러나 고향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출세를 했더라도, 아무리 학박사가 돼 가지고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어디로 가느냐? '아, 내 아내 아들딸한테' 하겠지만, 아들딸 거느리고 어디로 가느냐? 고향에 가려고 한다구요. 금의환향이라는 말이 있듯이 떠나면 떠날수록 외로운 겁니다. 외로워진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고향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187-290, 1989.02.12)

평생 잊지 못하는 정서적인 교재를 남겨 주는 곳이 고향

여러분은 우리 인생살이에 있어 어느 환경에 있느냐? 나라는 사람이 칠십이 넘다 보니 10대가 어떻고 20대가 어떻고 이러한 사연이 많아요. 고향에서 어떻게 했다는 것, 고향의 산천, 무슨 산 무슨 산, 무슨 산은 어떻고 어떻고…. 어렸을 때 거기서 전부 다 편답하면서 살던, 산에 올라가 가지고 야생화를 꺾고, 혹은 나물을 캐고, 이런 여러 가지 그 느낀 사실은 빼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어렸을 때 자기 집 가까운 거리에 있던 나무, 혹은 밤나무가 있었다든가, 혹은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다든가 하면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개 까치 둥지는 아카시아 나무에 많이 틉니다. 그 까치가 영리한 새라구요. 그 높은 꼭대기에 집을 지어요. 까치가 둥지를 틀어도 제일 높은 데에 틉니다.
여러분, 까치가 울게 되면 좋은 소식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깍깍깍깍 하면 좋다고 한다구요. 그리고 까치는 천문학에 대해서, 기후에 대해서 아는 거예요. 금년에는 비가 어디로 많이 올 것인가 하는 것을 아는 거라구요. 까치가 문을 내는 것을 봐 가지고 '아, 금년에는 무슨 바람이 많이 불겠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까치집을 보고 '아, 금년 농사는 태풍이 불겠기 때문에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까치는 바람 안 부는 데로 반대쪽에다 구멍(문)을 뚫는다구요.
그런 까치 둥지에 올라가 보면 말이예요, 까치들이 새끼 사랑하는 그 강한 모성애, 부성애라는 것이 대단해요.
까치는 절개가 있는 새입니다. 일반 새를 보게 되면 알을 깔 때만 만나는 새들이 있다구요. 그러면 만난 지 몇 달밖에 안 됐기 때문에 그 모성애에 차이가 있을 것이냐? 차이가 없다구요. 내가 새를 굉장히 좋아 했어요, 이 한국에 있는 새들을. 그래 관찰해 보니까 모성애라는 것은 오래 쌍쌍이 사는 비둘기 같은 새나 무슨 새나 전부 다 새끼를 사랑하는 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까치 둥지를 구경하러 쓱 올라가게 되면 말이예요, 처음엔 까치가 와서 쪼는 거예요. 그래서 보통 나무에 올라갔다간 문제가 생겨요. 까치 둥지는 높은 곳에 있지만, 이거 궁금하거든요. 그래서 보니까 둥지를 나무 위에 틀고는 그다음엔 검부러기를 갖다 놓았습니다. 그거 보면 새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 있어요. 어디서 솜 같은 것, 포근포근한 것을 물어다가 만들었어요. 아주 사람들이 잘 꾸며낸 안방보다 낫다구요.
이렇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놓고는 말이예요, 이젠 암놈이 들어가 가지고 알을 낳는 거예요. 그 까치알이 참 곱습니다, 파르스름한데 줄이 있어요.
그게 관심이 있어서 매일같이 올라갔어요. 맨 처음엔 까치들이 죽겠다고 야단해요. 그렇지만 매일같이 올라왔다 가더라도 이상이 없거든요. 이상이 없으니까 그다음에는 매일같이 올라가더라도 까치들이 와 가지고 깍깍 하고 인사하는 거예요. '또 왔구만. 잘 보고 가' 그거예요.
이렇게 오르내리면서 보면, 이것이 알 까고 난 다음에 알에서 새끼가 나와서 자라는데 새가 참 빨라요. 그러면서 정이 드는 거예요. 그러다 까치 새끼 다 커 가지고 나가게 된다면 말이예요, 얼마나 서운한지 몰라요. 그 철부지할 때 말이예요, 그걸 보고 '아하, 나도 어지간히 정이 많은 사람이다' 하는 걸 느껴 봤습니다.
그 아카시아 나무, 가시가 돋고 보기 싫은 나무지만 나와 인연되었던 건 일생 잊혀지질 않아요. 어떤 해는 가지까지도 생각이 나요. 지금도 그래요. 요런 가지가 있었고 요런 가지가 있었고…. 어떤 때는 올라갔다가 후루룩 내려오고 하니까 어머니는 참 걱정이지요. 그 높은 곳을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하니까 말이예요. 그 높이가 얼마나 되느냐 하면 한 30미터 됩니다. 그렇게 높은 나무인데, 순식간에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는데 한번 잘못하면 야단나겠거든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그러지 말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러지 말라는 것보다도 재미가 더 있기 때문에 한 거예요. 그러한 것은 잊을 수 없는 모든 사실들입니다.
그런 한 가지를 중심삼아 가지고, 새면 새에 대해 비교해 가지고 생태를 연구할 수 있는 이런 교재가 많은 것입니다.
고향에 가게 되면 개울이 있다구요. 거기에 사는 고기라는 고기는 다 잡아 봤습니다. 미꾸라지가 있고, 뱀장어가 있고, 게가 있고, 뭐 별의별 것들이 다 있습니다. 그래 오만가지 담수고기를 다 잡은 거예요. 큰놈 작은놈할 것 없이 말이예요.
그때는 뭐 철이 없었으니까 구덩이를 파 가지고 물구덩이를 파 가지고, 말이예요-고기는 물 안에서는 다 사는 줄 알았어요-고기를 잡아 넣어 두면 하룻밤 자고 나면 다 나가자빠져 죽어 있어요. 그걸 잘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정성들여서 널 살려주려고 하는데 왜 죽었노?' 하는 거예요. 사정도 모르고 말이예요.
그거 보면 선생님이 정적(情的)인 사람이예요. 고기보고도 '야, 네 엄마가 울겠구나' 그런 거예요. 그 고기보고 울었다구요. 그러면서 지내던 모든 것이 회상됩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라는 데 있어서 정서적인 많은 교재를 남겨주는 곳이 고향입니다.
산을 바라볼 때도 잊을 수 없는 모든 정서적인 것이 있어요. 또 개울을 볼 때도 그래요. 개울이 있다면 거기에도 수많은 어족들이 살고, 수많은 벌레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전부 다 배움의 재료로 활용할 때는 모든 지식을 공급하는 데 잊을 수 없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고향의 산하에 있는 모든 동식물에 대한, 자연계에 대한 것을 교재로 삼아 가지고 자기 내적인 인간이 자라는 데 있어서의 풍요성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런 많은 재료를 남기는 곳이 고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 산천이 그리운 것입니다.
봄이 되면 봄동산에, 저 아지랑이 피는 봄동산 가운데서…. 내가 자연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산에 가서 낮잠을 자는 거예요. 큰 나무에 기대어 가지고 자연 가운데서 낮잠을 자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물을 뜯고…. 거 보면 뭐 많다구요. 이런 전부를 잊을 수 없어요.
자, 그런 걸 볼 때 고향 산천의 모든 것들은 자기가 인간으로서, 정서적인 인간으로서 자랄 수 있는 기본적인 교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 국민학교 시절에 책상에 구멍을 뚫었던 것이 지금도 생각나지요? 어디가 어떻게 돼 가지고 이렇고 하는 게 생각나는 거예요. 그와 마찬가지로 그 산천의 모든 나무는 다 같은 나무라도 거기에 나무의 모양 모양이 자기 인상에 남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모든 정서적인 면에 있어서 추억에 남고 기억에 남을 수 있는 하나의 교재로써 남겨진 박물관이라는 것입니다.
좋고 나쁜 것도 고향에서 배웠어요. 어렸을 때 어떤 때는 동네 애들하고 싸움해서 코가 터져서 피를 흘리게 되면 엄마 아빠 찾아갑니다. 엄마 아빠를 찾아가는데, 그 엄마 아빠가 '왜 싸워 가지고 피를 흘리고 들어와?' 하고 남의 사정은 모르고 꾸짖던 것이 지금 생각해 보니까 여러 가지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어머니로서는 남자라는 자식이 나가 싸워 가지고 매맞고 코가 터져 들어 오면 안됐지요. 내가 자식을 길러 보니 그런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는 '엄마가 왜 그럴까? 코피가 나고 이러는데도 씻어주지도 않고 도리어 투정한다고 야단이야' 이랬지만, 지금 철들고 보니 그때 엄마를 붙들고 '엄마, 고마워요' 할 수 있었으면 그 엄마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극과 극이예요.
(187-291, 1989.02.12)

베짜면서 다리가 부은 어머니

이렇게 보면 그 모든 재료 가운데서 제일 잊혀지지 않는 재료가 뭐냐? 그건 정서적인 면이예요. 우리 어머니가 많은 아들딸을 키우면서도 일하는 게 참 빨랐다구요. 보통 사람의 2배 이상 하신 겁니다, 2배 이상. 열 새-한 새가 스무 올이니까 열새면 이백 올입니다-짜리를 치면 뭐 이틀이면 마흔 자를 하셨어요. 한 필이 마흔 자예요. 하루에 열다섯 자, 스무 자를 짜는 거예요. 40자가 한 필인데 그걸 이틀 정도 만에 다 짰다구요.
보통 사람은 이 40자를 짜려면 하루에 다섯 자씩을 해도 8일이 걸릴 것인데, 어머니는 이틀이면 짰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많은 베를 짜기 때문에 다리가 붓습니다. 그래 나한테 와 가지고는 보여 줍니다. 그 때 '다리 안 아파, 엄마? 종일 했으니 얼마나 아파!' 하면, '아프긴 뭘 아파? 그거 안하면 어떻게 하노?'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다리를 보여 주며 '자, 이거 봐라' 해서 만져 보던 일이 잊혀지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자식들을 위해 그걸 탓하지 않고 자기 몸을 이기고 수고하던 그 어머니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한 부모님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 가면 갈수록 제일 그리운 것이 어머니예요. 어머니하고 그다음엔 자기와 놀던 형제들, 누이동생들입니다. 우리 누나가 있었어요, 손 위의 누나가. 나보다 두 살 위의 누나, 두살박이 터울인 누나가 있었는데, 그 누나는 나를 참 사랑했어요. 누구보다도 사랑했다구요. 내가 무엇이 없어서 야단하면 자기가 애지중지하는 보따리를 뒤지지요. 처녀 때는 그렇잖아요? 시집가기 전에는 말이예요, 요만한 보따리들을 다 갖고 있다구요. 내가 필요한 것이 있어서 '나 무엇이 필요해' 얘기하면 그 보따리에서 그냥 찾아 주었습니다. 엄마보고 뭐가 필요하다고 잉잉거린다고 엄마가 그걸 준비해서 주나요? 안 그러기 때문에 그 누님이 보따리를 뒤져 가지고 나를 불러다가 '야야, 여기 있다. 여기 있다' 하면서 주었습니다. 그러던 그 누나가 생각이 납니다.
그런 모든 것이 정서적인 면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것이예요. 요즘과 같이 이렇게 나이 많은 것보다 어렸을 때 그 모든 인상이 얼마나 자극적인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격 소양을 중심삼고 자기를 키워 나가는 데 있어서 정서적인 면이나 생활적인 면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사람이 한국사람 옷에 대해서 뭐 딴 데 가서 배우는 게 아닙니다. 고향에서 다 배우는 것입니다. 어떻게 입고 뭐 어떻게 하고 말이예요, 뭣이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을 다 배우는 거예요. 그다음엔 생활하는 모든 것, 어떻게 사는지 전부 다 배우는 거예요. 이러한 것을 보게 될 때, 그 모든 전부가 정서적인 배경이 깊어질 수 있는 모든 인연을 갖고 있고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잊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어느 방의 어디에 앉았고, 어머니 얼굴이 어떻고, 그 느끼던 것들이 지금 와 보니 다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걸 볼 때, 그것은 일반 사람들이 싸움하는 그런 것이 아니예요. 거기에는 정이 교류되면서 자기 일가를 생각하고, 자녀를 생각하는 부모의 사랑이 꽂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이 그곳을 떠날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할 때는 어머니가 얼마나 그리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 어머니는 좋은 분이예요. 잘생겼든지 못생겼든지간에 어머니는 좋으신 분입니다. 물론 나쁜 일도 있을 거예요. 요즘에는 애기를 버리는 그런 일도 있지만 말이예요. 이렇게 볼 때에 좋았던 일보다도 자기가 잊을 수 없었던 것은 매를 맞고 그러던 것이 추억으로 남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집을 중심삼고 이웃 동네와의 관계, 이웃 동네 고향 마을 있잖아요? 거기 마을 가운데는 전부 다 문씨만 사나요? 다른 성씨가 들어와 가지고, 이씨도 와 있고 김씨도 와 있어요. 이러면 말이예요, 고향 어른들이 전부 다 텃세를 하는 거예요. 동네에 자기네는 사촌·오촌·칠촌 많이 사는데 외로이 혼자 들어와 사는 김씨면 김씨에 대해서 동네에서 뭐 어떻고 어떻고 하면서 텃세를 한다는 거예요. 자기네들은 사돈네 팔촌까지 나누어 쓰면서 말이예요, 그런 사람에게는 안 빌려 주거든요. 그런 뭐가 있다 이거예요.
그러면 난 못 견뎌요.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가 안 빌려 주면 내가 메어다가라도 갖다 주는 거예요. 그런 일은 못 견디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라던 그 모든 사실…. 아하! 그때 그 마음의 바탕이 오늘날 내가 이 통일교회를 세워 나갈 수 있는 교육의 한 판도였구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렇기 때문에 고향은 자기의 잊을 수 없는 교재요, 심정 가운데 남겨진 박물관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잊을 수 없어요.
(187-298, 1989.02.12)

고향은 심정적 재료를 공급받을 수 있는 곳

고향은 자기가 자람에 있어서 80퍼센트의 원자재를 공급하는, 그 인격을 중심삼은 원자재를 공급하는 데 있어서 심정적 분야다 이겁니다. 심정적 분야를 중심삼고 고향 이상, 어느 학교, 어느 유명한 대학의 학박사가 되더라도 고향 이상 심정적 재료를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이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고향에는 부모가 있고 할아버지가 있고 누나가 있는데, 그들의 정서적 관계는 영원을 따라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일시가 아니예요. 죽을 때까지 그 마음에 품고 간다는 거예요.
여자는 남편이 죽은 다음에 잊지 못하는 거예요. 일생 동안 그 가슴에 녹아 없어지도록 품고 가는 것입니다. 아들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일족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기 때문에 고향은 정서적인 면에서 오랜 인연을 중심삼고 누구든지 살려고 하는 곳이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그 귀하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변치 않는 사랑을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일생을 중심삼고 볼 때 부모를 못 가진 사람, 고아원에서 자란 사람, 고향을 못 가진 사람은 불쌍하지 않느냐? 아니예요. 그건 정서적인 분야예요. 남자면 남자로서 여자를 맞이해 결혼해 가지고 사는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심정적 생활이. 그렇지 않으면 고아원 생활이라든가 자기 심정의 세계에서 누구에게 신세를 지고 자랐던 거라든가, 그런것 전부가 추억의 대상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정서적인 면에 관계되어 있는 것은 잊혀지지 않아요.
(187-306, 1989.02.12)

자기가 거하는 곳에 따라 달라지는 고향

자, 고향이라는 말을 중심삼고 볼 때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고향에서 떠나 서울에 왔다면 서울은 외지예요. 그러면 평안도 정주 땅이 고향인데, 외국에 나가게 될 때는 어떻게 되느냐? 서울이 고향이 됩니다. 서울이 고향이 된다구요. 옛날에는 서울 사람을 만나면 경기도 패, 뭐 경기도 깍쟁이 그랬는데, 외국에 나가게 되면 경기도 사람이든 경상도 사람이든 전라도 사람이든 상관 없다구요. 자기 동포라는 거예요. 동포라는 그 자체, 우리 나라 사람이라는 거예요. '우리 나라' 할 때는 엄마 아빠 형님 누나 다 들어갑니다. 모든 풍습도 같고, 생활환경도 같기 때문에 그때는 연장된 형제와 같이 생각한다구요. 전라도 사람이라도 어려움이 있으면 말이예요, 내가 누나를 도와주던 마음같이, 딱 그렇더라구요.
만일 여러분이 영계에 갔다 할 때 어디를 그리워하겠어요? 이 지구성입니다. 이 영계에 가게 되면 말이예요, 몇천 년 전에 산 영인들을 만나요. 영계도 마찬가지예요. 영계에 가 있는 사람들이 고향이 있다 할 때는 영계가 고향이겠어요, 지구성이 고향이겠어요? 영계에 살면서도 고향이 어디냐 하고 묻게 된다면 지구성이라고, 지구성 어디라고 얘기한다는 거예요. 이걸 볼 때에, 거 왜 그러느냐? 지구성이 자기 고향과 얼마나 멀어요? 부락으로 말하면 뭐 수백만 개 가운데 하나밖에 안 되는데 그걸 다 포괄하고 있는 지구성이 내 고향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왜? 고향에는 자기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주체의 자리에서 생각하는 부모님이 계시고, 형님이 계시고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래요. 지금까지 나같이 형제들 앞에 책임 못 한 사람이 없어요. 다 잊어버리려고 애썼으니까. 남들은 기억하려고 애쓰지만, 나는 잊어버리려고 애쓴다구요. 왜? 아벨보다도 가인적인 전체를 사랑하고 아벨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원리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내가 하나 잊혀지지 않는 것은 감옥에 있을 때 우리 누이동생이 돌아갔다구요. 어머니가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기 힘들어서 우리 이모가 와 가지고 '아이구, 형님은 아이들도 많고 하니까 제발 우리한테 딸 하나 주시오. 내가 길러서 시집까지 다 보내 줄테니까' 이래 가지고 누이동생이 평양의 우리 이모네 집에 갔다구요. 그 이모는 딸이 없었다구요. 그래 내가 제일 사랑하는 동생이예요. 그래 가지고 동생을 보내 놓고 내가 울던 생각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거 보면 형제가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내가 서울 왔다 갔다 할 때 그 이모네 집에 들러 동생을 만나 가지고 얘기하고 그랬습니다. 만나면 참 눈물이 어려 가지고 얘기하던 것이 지금도 추억에 남아 있어요. 그렇게 사랑하던 누이동생이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병도 무슨 병인지 모르게 슬슬 아프다 돌아갔어요. 그것을 옥중에서는 몰랐다구요. 그런데 한번은 쓱 영적으로 나타나 가지고 흰옷을 입고 인사를 하더라구요. '나는 이렇게 됐다'고 말이예요. 그때가 영계에 간 날이었던 모양이예요. 예쁘장하게 생겼던 누이동생인데, 그게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정서적인 추억의 내연이라는 것은 그것을 극복하는 힘이 없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사랑에서 나서 사랑을 중심삼고 살게 마련이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생애에 모든 추억의 감성을 되돌아서 가게 될 때에 사람은 사랑을 중심삼고 사는 것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영계에 가서 높은 자리에 가고 싶은 사람은 그 누구보다 사람을 위해서 눈물을 많이 흘리는 사람이 되라구요. 부모의 마음과 같이, 부모의 몸과 같이 말이예요.
(187-309, 1989.02.12)

대우주권의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포용해

영원히 안식해 살 수 있고, 행복의 터전을 무한한 세계에 확대했다가 무한한 세계로 축소시킬 수 있는 힘의 모체인 사랑의 왕궁이 있다 할 때 나는 거기에 가서 살고 싶어요. 나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싶어요. 나는 그런 본향 땅, 본향의 고향을 갖고 싶어요.
여러분은 일방향성의 세계에 가서 정착할 것이냐, 사방성, 입체성 세계의 고향에 가서 정착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여러분의 일생에 남은 과제일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본래 심정적 도량이라는 것은 무한합니다. 동서남북 전후좌우 구형체를 확대해 우주까지도 접선할 수 있는 본바탕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이 무한히 확대하려고 그러는데, 이것이 나인데, 내 확대한 본성 인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확대한 사랑의 본성을 얼마만큼 협조해 주느냐 이거예요. 심각한 문제입니다.
동으로 서로 남으로 북으로, 전후좌우로 뻗고 싶은 본성의 사랑의 심정권이 내 본성인데도 불구하고 얼마만큼 내 자신이 그 힘을 주어 가지고 뻗어 나갈 수 있는 원조자가 돼 있느냐? 혹은 반대자가 돼 있느냐? 원조자가 될 때는 모든 우주 전체가 내 고향이 된다는 거예요. 평안도 정주가 내 고향인데, 정주에서도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한 점인데, 이것이 확대하면 무한히 커져요.
(187-318, 1989.02.12)

고향을 생각하듯이 삼천리강토를 생각하자

그러면 고향을 생각하듯이 삼천리강토를 생각해 봤느냐? 외국에 가서 외국의 감옥에 가 있으니까 그 자리를 넘는 것을 나는 발견했습니다. 아, 감옥이 불행한 곳이 아니구만 하는 것을 발견했어요. 외국 감옥에 들어가 보니까 한국의 감옥이 그리워요. 그렇게 생각할 때 '감옥살이가 불행한 것이 아니구만. 그러니까 한국에서 나를 잡아 감옥에 처넣은 원수들도 사랑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자리에, 내가 여기 있을 때 그 원수가 찾아와 가지고 옛날에 한국에서 당신을 감옥에 처넣은 이 불쌍한, 용서받을 수 없는 원수가 찾아왔노라고 눈물을 흘리게 될 때는 받들고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그러니까 '아,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판도권 내에서 한 것이 아니구만. 천상세계의 도리를 알고 대우주권 내의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볼 때에 이거 부락에서 싸우고 코피 터지고 그와 같은 것을 용서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겠구만' 하는 걸 느꼈어요.
그렇기 때문에 심정을 중심삼고 풍상을 많이 겪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니예요. 영계를 알고 보니 그래요. 못산다고 불행한 것이 아니예요. 자식 하나를 위해서 억천만금, 대한민국 땅을 주고 살 수 없는 보화의 가치로써 한 달 자기 월사금을 내는 부모의 그 기대는 천지가 동화한다는 거예요. 못사는 것이 불행이 아니예요. 그런 끈기 있는 부모들의 자손을 통해, 그런 어머니들의 계통을 이은 그 후대 가운데서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성자들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187-319, 1989.02.12)

마음의 영원한 본향을 찾아가는 방법

우리는 고향을 찾아가야 됩니다. 육적인 고향은, 내가 태어난 고향은 정주지만 영적인 고향은 저세계, 하나님의 심정이 있는 곳입니다. 육적인 고향은 횡적인 고향이지만 영적인 고향은 종적인 고향이예요. 횡적인 고향을 더듬어 세계를 사랑하고 나서야 종적인 고향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구에서 사는 것은 횡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훈련인 것입니다.
육의 고향은 자기의 난 곳이지만 영의 고향은 자기가 가야 할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고향은 잊어버리고 육적 고향인 정주에 가자' 안 그래요. 나를 다 잊어버리고, 어머니 아버지 다 잊어버리고, 우리 형제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해라 이거예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제일 황족을 사랑하라고 영적 고향에서는 훈시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고향복지를 찾아가야 할 인생의 행로 앞에서 탈락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고향을 넘어서, 이 나라를 넘어서, 인류를 넘어서 사랑하고 나서 하나님과 저나라의 선조들과 앞으로의 후손을 품고 사랑하며 가야 됩니다. 그런 고달픈 생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높은 하늘의 고향에 있어서 주인의 가까운 자리에 머물 것이다 하는 것이 천리원칙입니다.
나는 그걸 알았기 때문에 세계 사람한테 욕먹으면서도 간 것입니다. '세계 사람아 쳐라' 하며 간 거예요. 내가 이 횡적인 길을 바로 가야 할텐데 사방에서 전부 다 치니까, 사방에서 밀어 치니까 '지그재그로 갈 수 없어. 쭉- 곧게 가기 위한 시련이구만' 한 거예요. 그러니까 만사가 다 해결된 겁니다. 원수도 문제가 아니예요.
그래 횡적인 일생 행로를 거쳐 가지고 종적인 천상세계의 본향에 아버지를 찾아가 가지고 그 영원한 아버지 집에서 행복스러울 수 있는 아들딸이 될지어다! 그런 것이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소망의 기지가 아니겠느냐? 그래 얼마만큼 정성들여야 되겠는가? 그거 생각해 보라구요.
(187-320, 1989.02.12)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고향이 그립기에 그 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는 생애의 노정인 것을 저희들은 더듬어서 헤아렸습니다.
여기 선 자식도 육을 중심삼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중심한 형제와 그 마을과 그 환경을 잊어버릴 수 없사옵니다. 그럴 수 없듯이 우리 본향 땅에 있어서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데에 내가 육적인 고향보다도 하나님을, 육적인 형제보다도 하늘나라의 황족을, 육적인 나라보다도 하늘나라의 왕국을, 백성을 더 생각하겠다고 하는 생활을 한 사람은 틀림없이 하늘나라의 보호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을 헤아려서 말씀을 했습니다.
아버지! 고향은 좋은 곳입니다. 왜? 영원히 변치 않는 부모의 사랑이 깃든 곳, 형제의 사랑이 깃든 곳, 마을의 사랑이 깃든 곳, 그 누가 뭐라 해도 천년 수난길이 덮치고 또 덮치고 또 덮치더라도 그걸 넘고 나와서 또 그리워하는 것이 고향이기 때문이옵니다. 그걸 생각할 때 사랑이 위대한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오늘날 우리 생애에 있어서 하늘 고향을 중심삼고 가는 길 앞에 핍박이 가중되고 어려움이 가중돼도 또 살아나는 그리움의 마음, 영원한 주체되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고향의 부모를 대하는 마음, 일생을 넘고 또 넘고 영원히 갈 수 있는 이런 심정의 사무침과 흠모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두 세계의 고향을 가진 행복자인 것을 이 시간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가 주고 싶을 때 주고 받고 싶을 때 받을 수 있는, 사랑을 중심삼고 그와 같은 자리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향하여 스스로 살 수 있는 오늘의 자기 일생행로를 수습하고, 그 표준을 정해서 엄숙히 본향에, 마음 깊고 큰 그 세계에 박자를 맞추고 그 길에 협조할 수 있는 몸의 판도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부끄러운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에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게끔, 그것을 염려해 스스로 하루하루의 생활을 통하여 생애의 노정, 일생의 노정을 다짐지으면서, 조여 가면서 살 수 있는 통일교회 신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70세를 맞이하여 처음 맞는 주일인 이 날에 고향을 말했습니다. 제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 고향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갖추어야 할 모든 준비가 미진한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금후의 10년, 혹은 그 이상의 해를 놓고 온갖 충성과 온갖 노력을 가중시켜야 할 책임을 느끼면서 오늘 말씀을 했습니다.
이들이 이 말씀을 통하여 마음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본향을, 본성의 고향을 그리워하기에 모든 것을 잊고 넘어갈 수 있는 자랑스럽고 담대하고 강한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허락하신 그날 그 고향 땅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랑받고 환영받기에 당당한 아들딸이 되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읍나이다. 아멘.
(187-321, 1989.02.12)

2) 본향

① 본향의 뜻

여러분에게는 고향이라는 것이 인상적일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지만, 대개 그 고향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고향이 아름답고 좋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진짜 고향의 맛은 고향을 떠나보아야 느낄 수 있습니다. 본향이라는 것도 본향 땅을 떠나봐야 그 맛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태어나서 살고 있는 고향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찾아 나가야 할 본향 땅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원래 우리의 인간 시조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그 본향은 어디일 것이냐? 아담과 해와가 살던 에덴동산이요, 그 마을이요, 그 산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날 타락한 부모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인간들은 '본향' 하면 자기들이 태어난 곳을 생각하는데, 오늘날 인류가 추구하고 그리워하고 있는 이상적인 본향이라는 것은 너무나 헛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찾아 나가는 최고의 목적지는 어디냐? 우리는 잃어버린 본향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그 본향에는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가 있고, 친척이 있습니다. 그들이 슬픔 가운데서 우리를 맞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과 행복 가운데서 우리를 맞아 줄 수 있는 곳, 그리고 그 기쁨이 일시적인 기쁨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그 본연의 곳을 우리들은 찾아가야 됩니다.
본향이라는 곳은 어떤 곳이냐? 집을 떠나보면 잘 알 수 있듯이 가고 싶고, 보고 싶고, 살고 싶은 그러한 곳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고 싶고 마음과 더불어 몸이 가고 싶은 그러한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러한 본향에 갈 수 있느냐? 갈 수 없습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과는 상충된 거리에서 언제나 간격을 두고 서로서로가 밀고 밀치며 싸우는 노정을 거쳐가고 있습니다.
마음이 그리워함과 동시에 몸도 그리워하는, 영원히 안식할 수 있고, 행복의 터전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본향을 우리는 찾아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과정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본향을 그리워하고, 추구하고, 흠모하다가 죽어 갔습니다. 또한 수많은 종교인들이나 철인들도 이 본향 땅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수고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향 땅이 기필코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향을 그리워하는 우리 종교인들을 이끌고 그 본향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지금까지 투쟁해 나오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기필코 그러한 사람을 본향으로 인도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땅에서 준비를 하여 하나님께서 '네가 본향 땅을 그리워하듯이 나도 너를 그리워했다'고 하실 수 있는 실질적인 내용을 갖고 저나라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3-72, 1969.05.11)

② 본향 집

우리가 고향을, 본향의 집을 왜 그리워하느냐? 본향 하게 되면 반드시 집을 생각하는데, 집을 왜 좋아하느냐? 그 집이 무슨 집이냐? 하꼬방집, 들어가서 보았을 때 그게 그 나라에 있어서 한 10등 이하의 집이라 하더라도 그집은 그리운 거예요. 찌그러진 하꼬방집에서 사랑하는 그대와 속삭이던 그것을 호화스러운 궁전의 보좌에서 사랑을 속삭인 것에 대조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 내 본향의 집이 어디냐 할 때, 어디라고 해야 되겠어요? 내 본향의 집이, 그 본향의 집이 어디예요? 우리는 말하기를, 통일교회 교인들은 본향의 집이라 하면 그 집은 하꼬방집, 초가집, 무슨 기와집, 무슨 이엉집, 이런 여러 가지 집을 말하겠지만 그런 집은 필요 없어요. 사랑의 집을 말하는 거예요.
내 본향의 집이 어디냐 할 때, 본향의 집이 어디예요? 그건 집을 말하는게 아니예요, 내 본향의 집은 어머니예요. 어머니입니다. 본래 본향의 집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지요?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그걸 생각해야 됩니다. 이걸 생각해야 어머니가 귀한 줄 알아요. 고향 집만, 고향 땅만 그리워할 줄 알지만 그건 상대적 땅이지 본질적 고향 땅은, 주체적 본향 땅은 어머니 몸뚱이예요.
여러분 본향 땅이 어디냐 할 때, 나로 말하면 평안북도 정주 저 건너 산골 상사리예요. 그거 이름은 좋아요. 상사리라는 곳이예요. '그래 거기 가게 되면 뭐가 있노?' 하게 되면, 뭐가 있긴 뭐가 있어요? 있는 것 다 있지. 그렇지만 본향 땅은 거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가 내 본향의, 본질적 본향의 땅이라는 거예요. 어머니의 깊은 뱃속이 본향의 땅이라는 겁니다. 깊은 어머니의 사랑이 근본된 곳이 본향 땅이라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본향의 집, 그 집이 어디 있느냐? 어머니 아버지가 내 집이요, 그 집의 형제들이 내 집이예요. 그것이 사랑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동네 이웃사촌이 사랑의 내 집이요, 이 나라가 사랑의 내 집이요, 이 세계가 사랑의 내 집이요, 이 우주가 사랑의 내 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우주 집이라는 것입니다, 우주. 요즘엔 우주촌이라고 합니다. 우주촌보다도 우주집을 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촌이 아니예요. 세계의 집이예요, 세계집. 우주는 내 집이라는 것입니다.
(145-282, 1986.05.25)

③ 본향으로 돌아가자

본향으로 돌아가야 돼요. 여러분들이 돌아가려면 어떻게 돌아가야 되느냐? 실향 세계,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가려니 고향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향의 무엇이 어떻더냐? 고향의 사랑이 어떻더냐 이거예요. 부모님의 사랑이 그리워 돌아가는 겁니다. 부모님이 그리워 돌아가는 거예요. 형제가 그리워 돌아가는 거예요. 거기는 자기의 처자가 안식할 수 있고, 부부가 안식할 수 있는 곳입니다.
자, 이제는 돌아가야 할 텐데, 돌아가려면 어떻게 돌아가야 되느냐?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무엇을 잃었느냐 하면 부모님을 잃고, 그다음엔 자녀를 잃어버렸습니다. 지금은 사랑을 중심삼고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잃고, 부모님을 잃고, 그다음에는 형제를 잃어버렸습니다. 장자 되는 가인은 아벨을 잃어버렸어요. 형은 사랑할 수 있는 동생을 잃어버리고, 동생은 사랑할 수 있는 형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게 문제예요.
본연의 사랑에 반대되는 그런 입장에 선 사람들을 끌고 다니는 것이 뭐예요? 사탄입니다, 사탄.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지옥이 생겨난 겁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가정을 잃어버렸고, 그다음에는 종족을 잃어버렸고, 민족을 잃어버렸고, 국가를 잃어버렸고, 세계를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복귀노정에 있어서 제일 문제가 뭐냐? 세계를 찾기 위해서는 세계 구원에 앞서서 국가 구원이 있어야 됩니다. 세계가 나오려면 국가 과정을 거쳐야 되고, 국가 과정에 앞서 민족 과정이 있어야 됩니다. 민족이 없어 가지고는 국가가 안 나오니까 말입니다.
민족이라는 것은 수많은 종족을 연합시킨 겁니다. 수백 수천의 성(姓) 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민족에 앞서 종족을 구원해야 돼요. 종족이 하늘 편에 서 있어야 됩니다. 종족에 앞서 가정이 하나님 편에 서야 되고, 가정에 앞서 개인이 하나님 편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여러분 개인이 가정에 앞서 하나님 편에 완전히 서 있느냐 이거예요. 여러분들이 직장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는 것은 사탄세계의 혼탁한 물 가운데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임을 알아야 돼요. 이것을 언젠가 생수의 근원에 가서 씻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못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세계를 찾으려면 나라를 찾아야 됩니다. 환고향해야 할 텐데, 본향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타락한 세계가 있으니 이것을 수습해 놓지 않고는 못 돌아가요.
(147-245, 1986.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