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종류의 책을
내 북마크

아직 북마크가 없습니다.

1. 하나님이 인간을 교육하신 까닭

하나님은 4천년의 역사를 통해 수난의 역로를 거듭 걸으시면서도 앞으로 예수님의 뜻을 상속받을 수 있는 세계적인 터전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스라엘 선민을 키워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스라엘 선민은 전문가 되시는 예수님 앞에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입장에 서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가진 입장에 서기는 했지만, 그러한 자신을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지상에서 새로이 모색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다시 교육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29-84, 1970.02.25)

여러분은 자기 자식 하나 교육시키는 것도 힘들지요? 그 자식은 자기의 피살을 이어받은 아들딸입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 마음이 통하여 같이 눈물 흘릴 수 있는 아들딸입니다. 아버지가 눈물 흘리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동할 수 있는 아들딸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도하고 육성하려면 지극히 어렵지 않습니까?
그것을 볼 때, 오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울어도 본체만체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슬퍼해도 본체만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사탄의 혈육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찬양합니다. 망하는 것을 보면 좋아하며 웃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놓고 지도하고 개척의 방향을 가르쳐 주려니 얼마나 수고로울 것이냐? 그러나 하나에서부터 백, 천, 만까지 위하시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하나님에게 없었더라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섭리역사를 붙들고 나오실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섭리역사를 이끌어 나오시는 하나님의 그 사연과 입장은 어떤 것이냐 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내가 아니면 그들은 망한다. 망하는 것이 본연의 인간에게 부여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망한다”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당신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수난길을 개의치 않고 개척해 나오셨고, 수많은 인류를 교육해 나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42-254, 1971.03.21)

타락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랑의 마음을 갖고 나왔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갖고 나온 하나님은 섭리의 출발 당시부터 인간들에게 지식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보다도, 인간은 이래야 한다는 외적인 진리를 교육하는 것보다도, 사회와 세계에 대한 사정을 이야기하기보다도 보다 가치 있는 사랑에 대한 내용을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대해 가르치는 데는 제일 중요한 것을 중심삼고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아버지 입장에서 가르쳐 줄 수 있는 교육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냐? 사랑밖에 없습니다.
(42-338, 1971.04.11)

어머니 아버지를 중심삼고 태어날 때, 신랑 각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딸로 태어나서 사랑의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 부모는 아들딸에게 무슨 교육을 해야 되느냐? 지식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교육을 해야 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싸우는 사랑의 교육? 싸우는 사랑이라는 말은 없겠지요. 서로 서로가 하나되는 교육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사랑의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의 기원이 어디냐?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모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아담 해와는 사랑의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아담 해와의 가치 기준의 설정은 어디서부터 되어지느냐? 하나님의 사랑의 교육에서부터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교육을 받는 데는 어느 때까지 받느냐? 아버지가 아는 모든 가치의 기준을 헤아릴 수 있을 때까지, 다시 말하면 성숙할 때까지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중심 삼고 사랑의 교육을 받아야 했던 아담 해와의 사랑의 교육 기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없었다면 하나님의 이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의 교육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천국 가고 싶지요? 그러나 천국 가서는 그런 교육을 못 받습니다. 이 땅에서 교육을 받고 살다가 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그 교육을 안 하면 큰일나는 것이요, 안 받으면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가 교육을 받으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되느냐? 부모와 자식간이니까 부모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따라가야 합니다. 부모가 가게 되면 어디까지나, 언제나 따라가야 합니다. 부모가 산에 오르면 산으로 따라가고, 골짜기로 내려가면 골짜기로 따라가고, 굴속으로 들어가면 굴속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언제나 부모와 같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안 보면 보고 싶겠어요, 안 보고 싶겠어요? 만일 하나님이 아들과 떨어져야 한다면 떨어질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보고 싶어합니다. 절대적인 분이기에 좋아해도 절대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뭐 하나님, 오겠으면 오고 말겠으면 말고, 거 어디 있겠으면 있고 말겠으면 말고…” 그러면 되겠어요?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이들의 생명의 모체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부모는 그 아이의 생명의 모체지요? 생명을 키워 준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모체요, 사랑의 모체요, 보호의 모체입니다. 생명을 보호해 주고, 키워 주고, 사랑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보호권이 성립 안 되면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됩니다. 생명이 위협받으면 사랑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지금 죽게 되었는데 사랑이 성립되겠어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호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보호권을 만들었는데 보호해야 할 것이 누구냐 하면 천사장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생명의 기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천사장의 보호를 받아 사랑의 교육을 받는 도중이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그 교육을 다 받았더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을 것이냐?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했으니, 해와도 이렇게 사랑했고 아담도 이렇게 사랑했으니, 너희 서로서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보다 더 사랑하라”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 둘이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 것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어떤 길이냐? 그들이 성숙하여서 둘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 외에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한 몸입니다.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주체로 계시기 때문에 자체 내에서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생각으로는 “남성적 주체의 자리다. 여성적 대상이다” 해서 사랑을 느낄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남성과 여성이 분립된 입장에서는 자극적인 충격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가 자신을 제쳐놓고 자기들끼리 더 충격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볼 때, 사랑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은 나빠하시지 않습니다. 왜? 그 둘이 하나된 그 자리를 상대로 해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주체자이시기 때문에, 그 상대가 보다 가치적인 사랑을 느끼게 될 때, 하나님도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중심한 사랑의 제일 법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랑의 교육을 받지 않고는 그 자리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본래의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에, 예수가 그런 사랑을 어머니 아버지에게 “이렇게 사랑하고 살아야 됩니다” 하고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예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교육하는 데는 유대교 예법을 거친 자리에서, 성전이상을 완성한 자리에서 해야 됩니다.
예수는 하나님 대신으로, 아버지 대신, 신랑 대신, 오빠 대신 사랑의 주인공으로 왔기 때문에, 마리아 가정 전체는 예수를 하나님 대신으로 모셔야 했습니다. 예수는 요셉을 대하여 “야, 요셉아!” 해야 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마리아를 대해서도 “마리아야!” 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교육을 받게 되어 있었어요? 인정을 통해서 볼 때는 부자의 관계였지만 천정을 통해서 볼 때는 예수가 주체이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해서 왔기 때문에, 그 사랑의 도리를 따라서 그의 부모에서부터 형제까지 모두 예수에게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이렇게 살아야 하고, 형제들은 이렇게 살아야 되고, 형제들 가운데 내 상대는 이러이러한 여자라야 한다고 교육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렇게 교육해 봤어요? 성경에 그런 말이 있어요? 이건 진잎은 다 빼놓고 떡잎들만 가지고 천국 가겠다고 야단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지지리 못난 사람들을 중심삼고 3년 공생애노정을 갔습니다. 예수님이 모심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면서 제자들의 머리도 씻어 주고 발도 씻어 주고 한 것이 뭐냐? 그게 부모의 자리입니다. 부모의 자리에서 교육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육을 잘못 받았습니다. 죽을 때는 부모와 같이 죽자는 것이 예수가 가르친 사상의 골자였습니다. 자식은 부모가 죽기 전에 부모 대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모가 죽을 자리에서 도망을 간 것입니다.
인격적인 가치는 상대를 중심삼고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남편 된 사람은 아내 앞에 하나님보다 더 훌륭한 분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우리 남편을 통해서 하나님을 봤고, 세상의 순수한 사랑을 몰랐지만 남편을 통해서 세상의 순수한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을 통해서 오빠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편을 통해서 형제의 사랑을 내가 알았다. 남편은 모든 사랑을 가르쳐 준 주인공이다” 할 수 있는 남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어머니 대표요, 신부 대표요, 누나 대표의 심정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랑의 인연을 체휼하면서 살아가는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교육을 받아 그러한 교육이 아니고는 질식하겠다고 할만큼 그것이 생활습관이 되어서 어느 사회에서든 나이 많은 사람을 대하면 내 할아버지요, 그렇지 않으면 내 아버지 어머니요, 내 형님 누나요, 내 누이동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심정이 세계 도처에 보편화되면, 그러한 가정에서의 심정이 보편화될 수 있는 환경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그곳은 틀림없이 천국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반대를 받지 않습니다. 그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은 그와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디를 가도 외롭지 않는 것이요, 어디를 가도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51-167, 1971.11.21)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사상을 가진 민족이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나라의 주목적은 뭐냐? 사탄세계의 어떤 국가보다도 하나님을 위해 충성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하고, 그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중심존재를 맞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수천년 동안 메시아를 보내기로 약속하고 거기에 대한 교육을 해 나오셨습니다. (53-124, 1972.02.13)

하나님은 인간 쓰레기들이 하늘나라의 왕자가 될 것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교육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의 보좌권 내로 가는 데는 내 가정을 걸고 희생해서 나라를 구하고, 나라를 희생시켜서 세계를 구하고, 세계를 희생시켜서 하늘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옥을 해방할 수 있어야 하니 통일교회 가정들이 가는 길에는 눈물이 마를 수 없는 것입니다. (113-199, 1981.05.03)

우주 천지간에 제일 높은 분이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중심삼고 모여서 폭발적 작용을 하면, 인간과 하나님의 조화에 의해 우레질을 하고 번개를 치면 그 사랑에 달라붙은 것을 누가 떼겠어요? 독재자가 그거 싫다고 벗어나려 해도, 머리는 떨어졌어도 발이 안 떨어집니다.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실감이 나지요?
사랑의 흐름을 중심 삼은 천지조화는 밤낮으로 우리에게 자극을 주고 우리가 활용하게끔 교육 교재가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타락한 못된 인간 군상들은 왜 이렇게 혼란스럽고, 왜 이렇게 죽는다고 야단을 하고, 요사스런 전쟁으로 망할 놀음을 벌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걸 수습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봐야 통일교회밖에 없겠기에 하나님은 통일교회 문 선생을 붙들고 영원히 놓아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173-56, 1988.02.01)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은 어디를 중심삼고 연결되느냐? 횡적인 누구를 중심삼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같은 사람은 “아이쿠, 우리 아버지를 믿고 내가 출발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횡적인 자기 어머니 아버지가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초월해서 종적 기준에 설 수 있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출발했습니다. 그게 위대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세계의 종교를 비판하는 데에 생활법도를 중심삼은 교육이 더 중요하냐, 심정적 내연을 갖추어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의 내용을 강조한 종교가 더 중요하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175-243, 1988.04.24)

이 세상을 원상회복하기 위하여 하늘은 성인을 세워 천도를 밝히고 종교를 통해 인류를 교육해 오셨습니다. 악한 세상에서 선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이 쉬운 일일 수 없습니다. 의인· 열사들의 희생도 그 때문이었으며, 참된 도의 길이 뼈를 깎는 자기희생이요 무조건 베푸는 길이어야 함도 그 예입니다. (190-322, 1989.06.23)

지금까지 하나님은 어떻게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느냐? 하나님은 부모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이 인류를 인도해 나오셨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스승과 같은 입장에서 무지한 이 인류를 역사를 통해 교육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면 부모와 같이, 스승과 같이 교육하고 발전시켜서는 무엇을 할 것이냐? 부모 대신, 스승 대신 주인의 자리를 맡겨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섭리의 목적, 더 나아가서는 타락이 없을 때의 창조목적이었습니다. 부모를 대신하고 스승을 대신한 주인의 자리, 그 주인은 주체입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는 인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부모의 자리에 섰고, 그 다음에는 이 인간들을 사랑의 이상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렇게 가야 한다”는 원칙적 노정을 중심 삼고 교육하고 훈시하고, 그래서 다 자라서는 “부모의 자리를 대신하고 스승의 자리를 대신해서 영원한 중심 자리를 지키는 주인이 되라” 하고 싶으셨습니다. 주인이 되어 주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198-61, 1990.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