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하나님의 실존
1) 하나님의 실존 이해의 필요성
오늘날 선생님이 세계적으로 제창하는 사상적 내용을 보면, 첫째는 뭐냐? 세계 종교를 통일할 수 있는 원리입니다. 그럼 종교를 어떻게 통일하느냐?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더 확실히 가르쳐 주는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체험적 종교로써 실현화시킬 수 있다. 이론적 체계에 의한, 과학적인 데이터에 의한 체험을 시킬 수 있다. 그러지 않고는 종교를 하나 만들 수 없다' 이러한 원리가 종교에 대한 원리입니다.
둘째는 뭐냐? 사상에 대한 원리입니다. 세계가 혼란되어 우왕좌왕하면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혼돈 가운데 있는 세계인들 앞에 확실한 사상을 중심삼고 찾아 나갈 길, 그 길이 두 갈래라고 선생님은 보고 있어요.
사상은 무엇이냐? 인생문제, 개인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됐느냐? 인간 자체를 논하게 될 때, 인간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존재이지 근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제1원인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원인은 모르지만 결과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과적인 존재로 태어났어요. 사람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생각할 때, 결과적으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사람 될 수 있게 된 그 동기가 있음에 틀림없으니 제1원인적인 존재로 제시할 그 누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기 때문에 신에 대한 문제를 놓고 나에 대한 확실한 답, 신에 대한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터전 위에서만이 내 개인의 인생관이라는 것이 설정되고, 가정이 어떻게 살아 나가고, 사회가 어떻게 살아 나가고, 국가가 어떻게 살아 나가고, 세계가 어떻게 살아 나가고, 앞으로 이 세계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나만의 방향이 아닙니다. 나만의 방향이 아니예요.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문제와 원인적인 존재인 신이 있느냐 하는 문제를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철학을 추구하는 길이 무엇이예요? 철학은 이론을 통해 가지고 신을 규명하기 위하여 모든 지성인들을 투입했지만 실패의 낙인이 찍혔습니다. 신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중세의 로마 교황청이 참된 신을 가르쳐 주지 못했기 때문에 세계가 하나 못 됐습니다. 거기서부터 세계가 인본주의로 떨어진 것입니다. 신이 없다 이거예요. 망상이다 이거예요. 허구다 이거예요. 그건 왜? 신을 확실히 가르쳐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을 확실히 알려면 체험을 통해야 합니다. 체험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론만 가지고 안 됩니다. 직관을 통한 체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는 거예요.
종교는 뭐냐? 철학은 신을 찾아 나가다가 실패했어요. 오늘날 세계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라져 싸우고 있지만 이것은 실패로 끝난다는 거예요. 왜? 신을 발견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종교는 뭐냐 이거예요. 종교는 신의 규명이 필요 없습니다. 종교라는 것은 신을 발견하고 신과 더불어 살자는 것입니다. 사는 데는 이상적으로 살자고 하는 생활이념이 되어 있습니다. 생애의 행복을 신과 더불어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신과 더불어 사는 종교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 사상을 해결하는 데도 하나님을 몰라서는 못 하는 것입니다. 또, 공산주의를-공산주의는 유물론을 주장하는데, 물질주의인데-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을 몰라 가지고는 안 되는 겁니다. '신이 없다' 하는 그 주의를 확실히 멸망시키고, '신이 있다' 하는 것을 확실하게, 120퍼센트 강하게 해야 됩니다. 신을 몰라 가지고는 만사가 안 되는 거예요. 안 그래요? 사상도 신을 철두철미하게 확고히 알고 신과 더불어 상대적 자리라든가 대등한 자리에 서지 않고는 올바른 사상이념을 세계에 제시하더라도 그 변하는 환경에 휩쓸려 버립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사상이 못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141-234, 1986.02.26)
2) 본래는 자연히 알게 되어 있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물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본심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 시조가 타락하지 않고 선의 부모로서 이 우주 가운데 등장하여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이 번식되어 이 세계 인류가 되었다면 오늘날 인류가 하나님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공론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핏줄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대번에 몸으로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나무와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설명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지으셨다면 하나님은 창조를 잘못한 것입니다.
본래 인간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설명의 과정을 넘어서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자리에서 출발하여야 할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격리된 입장에서 출발되어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적으로 벌어져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논의하는 이런 세계가 된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고 본성의 선한 부모를 통해서 태어났던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변론은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자연히 안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뱃속에서부터 젖먹는 법을 배워 가지고 나옵니까? 나자마자 눈앞에 젖이 있으면 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자동적으로 알고, 자동적으로 해결하고, 자동적으로 가야 할 입장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전부 다 망각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의심하는 결과의 세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참한 사실입니다. (20-305, 1968.07.14)
3) 하나님의 편재성
우리 인간시조가,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일체가 된 이상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분립된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내적 아버지가 되고 아담 해와는 외적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지상의 세계가 지상만으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삼은 영계가 지상을 대표한 우리 인류시조와 완전히 하나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한 영계는 내적인 면을 표시하고, 아담 해와를 중심삼은 이 지상은 외적인 면을 표시해 가지고 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영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 우리의 마음 중심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 중심에 계신 그 하나님과 마음 중심의 명령을 받는 아담 해와는 한몸과 마찬가지예요. (145-309, 1986.06.01)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편재성을 어떻게 느끼느냐? 공기를 하나님의 입김과 같이 느껴라, 태풍이 불어오거든 그것을 하나님의 콧김과 같이 느끼라는 거예요. 흐르는 물이 있거든 그것을 하나님이 이 세계를 위해서 수난길을 극복해 나오시면서 흘리신 땀과 같이 느끼라는 거예요. 태양을 바라보거든 그 태양이 이 우주 전체의 생명의 요인을 상징하였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태양에서 배우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교본이요 교재로 전개시킨 것, 사랑하는 아들딸을 기쁘게 하기 위한 교재로 세워 놓은 것이 자연이 아니예요? 그렇다는 거라구요. 나뭇잎을 보고 자기 아들딸같이 여기고 혼자 중얼거릴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는 성인에 가까운 거예요. 알겠어요? 미친 사람이 아니라구요. (59-99, 1972.07.09)
4)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이시다
하나님은 죽어 있나요, 살아 있나요? 「살아 있습니다」 악마도 죽어 있나요, 살아 있나요? 하나님 봤어요? 어떻게 알아요? 악마를 봤어요? 어떻게 알아요? 그래 공산주의로 말하면 관념과 실재문제가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거지요.
보이지 않는 것은 전부 다 관념이예요. 추상명사. 양심도 관념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사랑을 봤어요? 말하자면 사랑도 관념, 추상명사예요. 그런데 사랑은 관념이 아니예요. 실생활의 모든 면에서 접촉하고 있는 거예요. (186-67, 1989.01.29)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이예요. 하나님은 스스로 '보이지 않는 주인이 되자' 그런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예요. 편리한 길 택하려니까 그들이 가만히 있으면 나 혼자 슬슬슬 마음대로 할 수 있게끔, 그들이 암만 따라잡으려고 해도 못 따라잡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게끔 되어지는 것이 제일 편리한 방법일 겁니다. 그러면서 주인 노릇 하면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러면서 주인 노릇 할 수 있으면 그게 바람직한 것이지, 210억 광년이나 되는 우주를 '내 품에 품겨 오라. 넌 내 안에 있어라' 해 가지고 이런 몸뚱이를 가진 하나님이라면 하나님 노릇 해먹겠나요? 하나님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의 거리가 얼마나 되겠어요? 그럼, 몸뚱이하고 마음하고 찾아가려면 얼마나 걸리겠나요? 하나님이 볼 때도 한심할 거예요.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지혜로운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중앙에서 마음대로 거동할 수 있는 무형적인 존재로서 이것을 지배하는 것이 제일 편리하겠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누가 불평해요? 하나님이 무형이니만큼 존재세계를 마음대로 뚫고 오더라도 누가 조금도 지장을 안 느껴요.
여러분들이 몸뚱이가 있지만 하나님이 와서 마음대로 지나가더라도 여러분들은 모른다구요. 하나님이 꾸벅꾸벅 자는 여러분들의 몸뚱이를 마음대로 밟고 지나가도 모르고 있다구요. 그러니 얼마나 편리해요. 제일 편리하겠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생각 끝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이 제일 편리할 것이다 해서 그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됐다 하는 논리는 가당한 논리라구요.
여러분들 공기가 통하는 것을 알아요?「예」 통하고 있지만 그걸 느껴요? 「못 느낍니다」못 느끼지요. 공기가 통하는 것도 못 느끼는데 하나님이 통하는 것을 알겠느냐 이거예요.
그래 할 수 없이 하나님은 무형의 신으로 계시는 것이 최고 편리한 방법이다고 하면서 이 큰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우주를 보자기로 싸고도 남을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형의 하나님이지만 무형의 하나님의 마음은 이 우주도 작다고 보고 더 큰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138-168, 1986.01.21)
5) 하나님은 체휼을 통해 알아야
자, 하나님이 있다, 막연히 하나님이 있다 한다면 우리하고 관계가 먼감이 들어요. 하나님이 있으면 있지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거예요. 관계, 릴레이션십(RELATIONSHIP)이란 게 문제인데, 어떻게 관계를 갖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130-209, 1984.01.22)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있다' 하는 것은 말뿐만이 아니라구요. 원리를 통해서 주체와 대상 관계를 중심 삼고 볼 때에, 하나님은 불가피적으로 있어야 된다는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기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냐. 내 모든 감각, 나의 일체를 주관하는 하늘이 아니냐 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식하고 아는 것이 원칙이 아니예요? 알고 인식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라 인식하고 알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우면 춥다 하는 것을 알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추우면 추운 것을 느껴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냐.
이와 마찬가지로 신이 계시다면 신이 계신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세포로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 경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체휼적 입장을 어떻게 우리가 확정짓느냐 하는 문제,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58-285, 1972.06.25)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느냐? 또는 '지금 받고 있느냐?' 하고 물어 보게 될 때, 어떻게 생각해요? 오늘날 세계 신학자들 중에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니들은 어때요? 통일교회 패들은 어때요?「압니다」
하나님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심정으로 체휼해야 됩니다. 느껴야 된다 이겁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사랑의 몫이 있습니다. 그 몫을 우리는 받아야 되겠습니다. (128-131, 1983.06.11)
여러분,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다가도 '아버지' 할 수 있고, 혼잣말로도 '아버지'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기 상대를 그리워하는 그 이상의 그리움이 복받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자고 밥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을 잊어버리면서 그 생활 이면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져 가지고 '아버지' 하게 되면, 아버지가 없는데도 아버지 손이 잡혀진다구요. 그런 일이 있다구요. 꿈같은 사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면 아버지 품에 안긴다구요. 이러한 표현적 권에 있어서 체휼적 감정을 어떻게 체득하느냐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체휼의 감도, 느끼는 그 도수, 그 양의 여하가 그 사람의 신앙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심정을 가졌다면 어디에 옮겨 가서 '내가 이것을 해야 된다' 하게 될 때는, '하늘이여, 같이해 주시옵소서' 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은 같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이 느끼게 될 때는 '고마우신 하나님' 하게 되는 것입니다. (58-292, 1972.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