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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모의 사랑

1) 부모의 사랑의 마음

자식을 낳아 길러 본 부모들은 알 것입니다. 애지중지하는 그 아들딸을 통하여 복을 받고 싶고 행복도 느끼고 싶을 것입니다.
또한 기뻐하고 복받을 수 있는 기준이 있으면 그 아들딸에게 영원히 남겨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의 마음을 가지고 그 아들딸이 고이 자라, 만국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만세에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를 타락한 인간도 바라고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그 아들딸이 상처를 입을까 보호하고, 애달픈 심정으로 초조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품 안에서 젖을 먹여 키우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자식이 똥 싸고 오줌을 싸서 냄새가 나더라도 사랑으로 그 환경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랑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 본연의 심정을 통하여 아담과 해와를 사랑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애기를 품고 키울 때에 잠자리에서도 노래를 불러주고 혼잣말로 얘기도 해주며 잘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못나고 부족한 자식이라도 그 자식에게 결함이 있으면 부모의 마음은 그 가슴이 몽땅 젖도록 최고의 고통을 겪는 것이요, 이것이 풀어지면 그 고통에 비례한 만큼 기쁨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마음이야 어떠하시겠습니까?
(20-208, 1968.06.09)

부모는 아들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면 '이놈의 자식 잘 갔구나!'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을 용서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려고 한다고요.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요. 그래서 부모의 사랑이 귀하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만약 그 아들이 사형수가 되어서 죽는 시간이라면, 아들이 사형받는 시간을 어머니가 안다면 통곡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법을 다 변경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을 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면 무슨 모험이라도 생명을 바쳐 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변치 않는 사랑 있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은 귀하다는 거예요.
부모의 마음으 사형장에 끌려가는 아들을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요, 없어요? 그 어머니의 사랑이 참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보다 못하겠어요 더 하겠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자동으로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므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을 능가한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어요.
(91-146, 1977.02.06)

여러분들 중에서 자식을 잃어 본 부모가 있으면, 그 아픔이 어떻다는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타락한 세계의 둔한 우리의 마음이 그렇거늘 본질적인 세계의 본연의 그 자체, 순수한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상처는 얼마나 컸을 것인가? (127-35, 1983.05.01)

자기 몸을 치고 자기 몸을 잃어 가면서,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 자식을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50-276, 1971.11.08)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을 대해서 위하면서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예요. '내가 남의 자식만큼 해주지 못하고 부모의 책임을 못 했으니 요걸 갖고 제발 용서해 다오' 하는 거예요. (69-187, 1973.11.12)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 주게 될 때 '내가 너에게 며칠날 고무신 사 주고 옷 사 주고 너를 위해서 피땀을 흘렸는데, 그 가치는 몇천 몇백 몇십 전이다.' 하며 치부(置簿) 해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세상의 왕궁의 왕자 왕녀 이상 해주고 싶지만, 그 이상 해주고 싶은 마음을 느끼는 자리에서, '내가 정성 다해도 이것밖에 없으니 미안하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좋은 것 해줄께' 하는 마음을 부모는 갖고 있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좋아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주고도 부족함을 느끼고, 사랑하고도 덜 사랑한 것이 있지 않겠나 하며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 주고 나서 섭섭하고 안 된 마음, 이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한 사랑과 통하는 본질에 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것이 사랑의 출발의 전통적 동기입니다.
(60-81, 1972.08.06)

2) 부모의 마음은 시공을 초월

세상의 타락된 인간 끼리끼리의 사이에도, 부자지간에 서로 갈라졌다가 어떠한 연유로 인해서 장년이 되어서 만나게 되는 것을 여러분은 영화 같은 데에서 봤을 거라고요. 그 아버지가 아들을 찾기 위해 고통을 극복하면서 수고하는 것이 부모 된 도리가 아닙니까? 자식은 모르기 때문에 생각하지 못하지요.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부모가 수십 년이 넘어 50세가 된 아들을 만났다 하게 되면, 부모가 그 아들을 만남과 동시에 '야, 야, 이 녀석아, 50세가 되도록 내 생각도 한번 안 했어?' 이래요?
'야, 너하고 나하고 어디 한번 역사를 말해 보자' 이래요? 어때요? 역사는 다 집어치우는 거라고요. 역사를 초월하게 하는 것이 뭐냐? 심정입니다. 자기 사정을 초월하게 하는 것이 심정입니다.
아버지인 줄 알게 되면 과거야 어쨌든 체면불구하고 자식은 '아버지! ' 하는 거예요. 면목이야 있겠으면 있고 없겠으면 없고 그것을 모른다는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 '야 아무개야!' 하며 벼락같이 부등켜 안는 거예요. 그래요, 안 그래요? '야, 야, 야, 조금 스톱, 생각해 보자' 이러겠어요?
'야, 너 아무개 녀석아, 어릴 때 고생한 것을 좀 알고 만나자' 그래요? '내가 너를 찾아 만나기 위해서 눈물을 이렇게 흘렸기 때문에 너도 한번 흘려 보고 만나자' 그래요? 그런 것은 다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일화시키고 귀일화시킬 수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니요, 사연이 아니요, 사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그것뿐입니다. 이 힘만이 역사를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가 없을 거예요.
(61-25, 1972.08.20)

타락한 이 땅 위의 부모들을 중심 삼고 보더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 외국에 가 있다면 그 부모는 언제나 외국 간 아들을 마음에 두고 있어요, 안 두고 있어요? 「두고 있습니다.」
아들이 외국 가 있는데 마음에 두고 있어요? 이런 말 자체가 전부 다 종교적인 술어예요. 아들이 외국에 가 있는데 마음에 두고 있단 말이예요. 그걸 보면 마음은 거리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마음에 두고 싶으냐?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 사랑하고 싶겠어요?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데 요만큼 사랑하고 싶겠어요?
'그거야 박씨 성을 가진 여자로서 내가 김 아무개한테 시집을 왔는데 그 김 아무개라는 영감의 됨됨이가 열 냥쯤밖에 안 되니 자식이 아무리 훌륭했댔자 그보다 나을 수 있나? 그러니까 아홉 냥쯤 정도로 사랑하자!' 그래요?
아버지는 꼬락서니가 뭐 꼴뚜기 새끼처럼 형편없는 데도 불구하고 자식은 어느만큼 크게 생각하려고 그래요? 하늘땅보다 더 크게 생각하려고 그럽니다. 이게 다 모순이라는 거예요.
헤치고 들어가면 문제가 많다는 거예요. 아무리 작은 존재라도 그것이 마음속에 두고 싶은 진정한 사랑의 인연을 맺게 될 때에는 큰 존재로 모시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48-207, 1971.09.19)

사랑의 힘은 모든 것을 통찰한다는 거예요. 사랑의 힘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의 마음은 거리를 초월합니다. 거리를 초월해서 연락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영화를 보게 되면, 자식이 교통사고가 났을 때 어머니 아버지가 꿈 가운데서 교통사고가 나는 것을 보고 '악!' 하고 놀라 일어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사랑의 줄기를 통해서 반응하는 거예요. 사랑의 줄을 통해서 실상이 그냥 그대로 옮겨지는 거예요. 실상뿐만 아니라 실체가 교류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 사랑의 줄을 타고 하나님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예요.
(162-286, 1987.04.17)

3) 부모 마음의 흐름

여러분들이 흔히 세상에서 보아서 알겠지만 어떤 부모의 아들 가운데 불구자가 있다면 그가 부모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그 얼마나 비참할 것이냐 이거예요.
백을 사랑해도 백만큼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하나의 사랑도 알지 못하는 자리에 서 있는 자식을 대하는 부모, 그렇지만 자식을 사랑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부모, 언제나 줘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사랑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한 아들을 보게 될 때 백을 기울인 사랑을 가진 부모는 백 이상 몇 배의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사랑을 가지고 자식을 사랑하려 할 때, 그 사랑을 대할 수 있는 자식을 갖지 못한 부모는 그 이상 슬픔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상 기가 막힌 것이 없는 것이 아니냐.
만일에 백 만한 사랑을 주려고 할 때 백 이상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 혹은 아들로서 딸로서 나타나게 될 때 그 부모는 얼마나 기쁠 것이냐? 천을 준 이상의 기쁨을 그 자리에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반대의 여건이 성립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게 될 때, 자기가 주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자식을 갖지 못한 부모는 불쌍한 것입니다, 그것이 한 번뿐만 아닌 영원히 그런 자리에 서게 된다면 그 부모는 불쌍하고 비참할 뿐만이 아니라, 기가 막힐 것이 아니냐.
(62-17, 1972.09.10)

사랑하는 부모가 볼 때, 자기 자식이 병자가 되어 있고 병신이 되어 있을 때에는 높고 깊은 사랑의 심정이 그 병신 자식에게로 흐르는 게 원칙입니다. 그게 틀렸어요?
그런 불구자의 심정은 계곡입니다. 부모의 심정은 꼭대기의 큰 자리입니다. 그러한 부모의 심정이 꼭대기로부터 그 깊은 골짜기로 흘러갑니다.
(147-166, 1986.09.07)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품에는 나쁜 것이 없습니다. 어머니 옷이 누더기면 누더기일수록,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그것이 눈물의 깊은 골짜기를 파 내려가고 있다는 겁니다. (173-263, 1988.02.21)

사랑하는 자식을 대하는 부모는 자식에게 결점이 있더라도 그 결점을 먼저 들춰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좋은 점만 닮기를 바랍니다.
자식의 악한 면을 보고 뺨을 때렸을지라도 동정하고 후회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의 악한 여건을 기준으로 해서 때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닮은 작은 부분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악한 면보다 크게 보려는 기준을 중심 삼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16-172, 1966.03.13)

한 집안에서 형제가 서로 의견이 달라서 싸운다고 할 때 부모는 어느 편을 드느냐? 주먹질을 먼저 하고 자기 욕심을 위해 싸우는 자식의 편을 드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역사 과정에서 교육과 인륜 도덕의 표준은 '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31-234, 1970.06.04)

세상에 둘도 없이 큰 농장을 가진 부집에 태어난 자식이 있다 할 때, 그 자식이 매일 말을 타고 달린다고 해서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힘든 일을 할 때 거들어 드려 부모와 심정의 인연을 맺어 나가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은 에서와 야곱 같은 입장인 것입니다.
(33-321, 1970.08.23)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두고 볼 때, 못났다고 해서 못난 자리에 두고 싶어 하시지 않습니다. 자식은 못났지만,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더 높은 자리에 세우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어서는 친구라든가 혹은 스승이 제자를 보게 될 때, 못났으면 못난 것에 걸맞는 자리에 세우고 싶어 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보다 높은 입장에, 귀한 자리에 세우고 싶어 하십니다.
못난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대해 염려를 적게 해주신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못난 사람에 대해서 더 큰 염려를 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24-161, 1969.07.27)

4) 부모의 사랑은 수직이다

부모의 사랑은 수직입니다. 사랑은 직단거리를 통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수직선 앞에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건 평형선입니다. 이제 말한, 부모로부터 자식을 사랑하는 이 선은 평형선이 돼야 됩니다. 이게 틀리면 다 깨져 나가는 겁니다.
그래, 부모의 사랑은 이 우주가 막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자의 길과 그다음에 충신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신도 수직을 중심 삼고 평형선에 서는 겁니다, 위치는 다르지만. 아시겠어요?
(186-36, 1989.01.24)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횡적으로 잡으면 부자의 관계는 수직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수직, 수직선에서. 그래서 동양사상에서 부자의 관계는 변할 길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건 영원한 것이지만 자기 어머니와의 상대적 관계, 그것은 변할 수 있는 거예요. 수직에 따라서, 수직이 동서로 되게 되면 남북으로 위치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나 본질적 수직은 변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자의 관계, 이것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천리의 도리예요.
천주의 모든 존재들이 이것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인하고 긍정하는 거예요. 자연 긍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말에 자연히 순종해야 됩니다.
아무리 에미 애비가 살인강도라고 해도 자식 대해서는 '너, 살인강도 돼!' 라고 가르치는 부모는 절대 없다는 거예요. 자기는 마피아가 됐지만 '너는 마피아 되지 말라!'고 합니다.
누구를 시켜서라도 그 동네에서 옮겨 딴 곳으로 이동하려고 합니다. 내가 이번에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 그런 사람이랑 같이 있어도 봤지만 말이예요,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식 대해서 '너, 나쁜 사람, 나 같은 사람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왜? 천리의 본성적 기준이, 뿌리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떠날 수 없는 인간이므로 자식 대해서 '너는 이러이러한 나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하게 마련이라는 거예요.
자, 이런 것을 전부 다….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할 때 왜 해와부터 안 지었을까요? 쉬운 문제예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종적인 기준인 아들을 먼저 지어야 돼요.
종적 기준을 지어야 횡적 기준을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적 기준만 딱 세우면 횡적 기준, 이건 여자라도 돌 수 있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왜 남자부터 만들었느냐? 거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아니야! 수직적 개념이 먼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이상적 목적의 개념을 세워 놓고 창조적 개념을 투입한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할 때 근원이 있는데 그 근원의 기준이 뭐겠어요? 그 기준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나면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거예요. 또, 부모님은 자식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거예요. 이걸 떠날 수 없어요. 이걸 떠나면 고통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는 그렇잖아요? 어머니를 따라가고, 아버지를 따라가고…. 아이 시대에 제일 하나님을 모시는 거라구요. 나타난 하나님이 부모라는 거예요. 나타난 최대의 스승이 어머니 아버지라는 거예요.
나타난 생활의 모든 행복의 기지가 부모라는 거예요. 거기에서부터 행복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왜? 사랑을 중심 삼기 때문에. 사랑을 떠나게 될 때는 파탄이 벌어지는 거예요.
부모의 사랑은 무엇을 말하느냐? 그것이 수직적 관계에 있어서 뿌리가 되는 거예요, 뿌리. 그렇기 때문에 상하관계는 반드시 수직관계입니다.
꼬불꼬불이 아니라 직선 관계지요. 꼬불꼬불하면 제3의 기준이 개재됐다는 거예요. 자연적 힘이 아니예요. 제3의 힘이 개재되어 꼬불꼬불한 거라구요.
(145-188, 1986.05.04)

5) 부모의 사랑의 기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기원과 동기는 어디에서부터 시작 했느냐? 남자 여자를 중심 삼은 사랑은 변하는 사랑인데, 거기에서 태어난 아들딸을 중심 삼은 사랑은 왜 변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남녀를 중심 삼은 사랑에서 기원된 것이 아니라, 횡적인 부부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아니라 종적인 어떠한 흐름의 기원을 통하여서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종적인 사랑의 주체가 누구냐? 그러한 주체를 우리는 신(神)이라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의 주체로서 인연될 수 있는 관계에서 연속적으로 상대를 추구할 수 있는 그런 본연의 자리에 서 있는 어떠한 절대적인 주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부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횡적인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터치(TOUCH)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 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변함이 있어요?
(48-152, 1971.09.12)

오늘날 민주주의 세계에 있어서 개인주의 사상이 팽배해 있는 이때에 있어서, 자식들이 하는 말이 '부모는 구시대라 우리의 신시대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합니다.
자식들은 그렇게 변했지만 부모의 마음은 변하는 게 아니예요. 자식들이 구시대니 신시대니 하고 부르짖는다고 해서 '네가 그래? 나도 그러자!'
그렇게는 안 되어 있어요. 부모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건 미물(微物)도 마찬가지예요. 새끼를 사랑하는데 있어서는 자기의 생명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랑은 어디에서 왔느냐? 나 자신이 제1의 어떤 상대적인 결과의 존재라면 그것은 제1의 어떤 힘의 인연 가운데서 온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터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을 혁명하자! 혁명의 기수가 되자!' 하는 사람 보았어요?
만약에 어떤 부모가 이 사랑을 혁명해서 인류역사를 개조해 버리겠다 해 가지고 '나는 부모는 부모지만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나섰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그 부모는 자식의 배꼽이 떨어지는 순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것입니다.
모든 생물은 어떠한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자기 새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데 생명을 투입해서, 생명을 고임돌 삼아 가지고도 하고 싶어하는 작용이 있는 것을 보게 될 때, 만고불변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절대성 (絶對性)을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절대 그 자체는 못 되지만, 인간 앞에 제일 가까운 고임돌은 될 수 있습니다.
단 하나의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둘이 되면 안 되는 거예요. 단 하나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것이 인간세상에 있어서 그래도, 역사를 보게 될 때 영원한 발판이 되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의 사랑은 어디에서 왔느냐? 그것은 아버지에게 어떠한 권고를 받아서 배운 것도 아니요, 자기 상대에게 충고를 받아 배운 것도 아니요, 자기 자신이 그러겠다고 생각해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자연히 그리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연히 그리 되는 데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48-152, 1971.09.12)

6) 부모의 사랑의 특성

부모는 자식 앞에 모든 면에서 주체가 되고 표준이 되지만 사랑 앞에서 만은 약합니다. 사랑을 들고 나오게 될 때는 부모의 권위는 없다면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부모의 권위가 까꿀잡이가 돼요.
그렇게 까꿀잡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권위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까꿀잡이가 된 자리에서 다시 본연의 자세를 갖추어 나갈 수 있는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중심 삼고 내려갔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막히는 것이 아니라 내려간 그 자리에서 영원을 향하여 갈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48-146, 1971.09.12)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부모는 이래야 된다.'고 하는, 어떠한 고착된 형태를 가지고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자기를 부정하는, 즉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는 부모의 권한을 가지고 언제나 당당한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권한을 망각한 자리에서, 그 이상의 자리에서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자식 앞에 임하는 것이 부모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은 부모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라고 해서 부모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상대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은 자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라는 말은 자기를 중심 삼고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기 이상 존중하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는 그 자체는, 상대를 위해 태어났다는 것과 통하는 것입니다.
(59-292, 1972.07.30)

가정을 중심 삼고 볼 때, 자식은 '어머니는 영원히 내 것이다' 합니다. 그 어머니는 자식에게 자기의 피살을 나누어 주면서 좋아합니다. 이것을 볼 때 좋은 것은 뭐냐?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친구가 좋다 하는 것도 곧 희생하기 때문입니다. 남한테 주면서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남을 위해 희생하면서 자기에게 제일 귀한 것을 주고도 더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주고 나서 그것을 다시 받겠다고 하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주면서도 너무 적어 부끄러움을 느끼며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식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사랑은 다릅니다. 부모는 주면서도 더 좋은 것을 못 주어서 한이고, 자식은 '나는 효자다.' 하면서 만족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이 다르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했는데 엄마 아빠는 뭐했어요?'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라는 한계선을 못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사랑은 자기라는 한계선을 넘는 것입니다.
(36-286, 1970.12.13)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를 사랑할 때, 혹은 부부간에서나 형제간에 있어서 언제나 주체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먼저 줘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자녀들이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저 기쁨 속에서 자연적인 사랑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66-120, 1973.04.18)

왜 그러냐?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데 그걸 받기 위해서 사랑 안 한다구요. 후손을 더 사랑하는 밑천으로 삼아주기 위해 사랑한다구요. 미래의 사랑을 위해…. (130-275, 1984.02.05)

부자지간의 인연도 그렇습니다. 아들딸들이 어렸을 때에는 무릎에 앉혀 놓고 귀여워하면서 애지중지 기르지만 그 자식이 나이가 많아지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나이가 많다고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더욱더 입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애와도 바꿀 수 없는 내용을 중심 삼고 정성을 들이는 가치는 날이 가면 갈수록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의 사랑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아들이 된다면 효자라는 이름을 갖지 않더라도 효자입니다.
(33-86, 1970.08.09)

자, 그러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꾸 변할 수 있느냐 이거예요. 발전할 수 있느냐 말이예요.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이 변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그런 참된 사랑이 찾아진 자리에 있어서는 변하는 것도 허락지 않지만 누가 와서 보태는 것을 원해요? 누군가 와서 덧붙는 걸 좋아하느냐 이겁니다. 가할 수도 없고 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머니 아버지를 '아,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참 못생겼으니 너희 어머니 아버지와 바꾼다. 오늘 바꾸겠다' 하면 그거 바꿔지나요?「아니요」 그렇기 때문에 보태지도 못하고, 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66-154, 1973.05.05)

7) 부모의 사랑의 경지와 깊이

사랑은 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생명이 투입되지 않고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관계의 사랑을 두고 보더라도 거기에는 생명의 인연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의 인연이 남아 있는 한, 생명의 인연 속에서 소원을 갖고 있는 한 거기에는 반드시 사랑의 인연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인연을 떠나 가지고는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반드시 생명의 인연이 투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생명을 얼마만큼 투입해 가지고 사랑하느냐에 따라 보다 가치있게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그냥 그대로 생활적인 인연만을 통해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골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인 것입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을 부모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여력이 남아 있는 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과 생명의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부모에게서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저 애는 내 아들이니까 사랑하겠다는 의식적인 마음이 앞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보다도 그 인연보다도 앞선 자기의 생명력이 자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이 가정생활에서 잘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32-14, 1970.06.14)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할 때, 천년 만년 주고도 또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을 끊임없이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 주고 나서 '야, 요거 몇냥 몇전이다.'라고 하시는 장사꾼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습니다.
만민은 왜 하나님을 좋아하면서 따라가야 하느냐? 하나님을 왜 좋아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은 만민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시고 또 주시면서도 부끄러워하시며 '지금은 이것밖에 안 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라, 몇백 배 몇천 배 더 좋은 것을 줄 터이니…' 하십니다.
오늘 현재에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면서도 미래에 더 좋은 것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시며 주실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과 더불어 있으면 비록 못 먹고 못살더라도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못 먹는 자리에 들어간다면 미래의 소망된 자극이 현실권내에서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도리어 새로운 결심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자리, 그런 부모를 가진 자식이 '엄마' 하고 끌어안게 되면 몸만 끌어안겠습니까?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 자리는 미래를 위해 서로 위로의 눈물을 같이 흘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절망이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소망을 현재의 자극으로 여기고, 서로 결의하고, 서로가 맞부딪쳐 가지고 격려할 수 있는 폭발적인 자리가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자극을 끌어들여 가지고 현실권내에서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자리는 그러한 사랑권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권 내에 사는 사람은 불행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36-287, 1970.12.13)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 대해서 전체를 투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투입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와 같이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있겠다는, 상대를 위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있겠다고 하면 그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를 전부 다 자식한테 투입해 가지고 그 자식과 더불어 있겠다고 하는 데서 사랑이, 생명이,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냐 이겁니다.
(69-60, 1973.09.10)

부모라는 것은 말이요, 자식밖에 모릅니다. 내가 흥남감옥에 있을 때…. 흥남에서 정주에 가려면 차로 열네 시간이 걸립니다. 거기 가려고 통행증을 타기 위해 매달 공산당 패들 앞에….
더구나 선생님은 공산당을 때려잡는 챔피언으로 소문이 났었기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못살게 굴고, 물건을 가져오는 것을 방해하고 그랬을 거예요. 그런 환경에서도 선생님의 어머니는 천신만고해서 면회를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것입니다.
오는데 자식이 배고프고 어려울 것이라고 해서 정성을 다해 미싯가루 같은 걸 만들어 옵니다. 이북에 먹을 것이나 어디 많아요? 그것을 내가 잘 알아요.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 별의별 놀음을 다 해서 미싯가루를 해 가지고 아들이라고 찾아와 떡 내놓습니다. 면회할 때 한 30명이, 한 형무소 죄수들이 나와서 하는데, 부모들이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몇 년이 지나도 찾아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고향에서 누가 온다는 그 소식을 바라는 마음, 그것은 세상에서는 모릅니다. 지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설명해도 몰라요.
얼마나 간절한지, 얼마나 그리운지 모릅니다. 그런 사실을 내가 잘 아는 사람인데 어머님이 한 달에 한 번씩 찾아 오니 얼마나 반갑고 그립고 좋겠어요?
미싯가루를 딱 주면서 하는 말씀이 너만 먹지 다른 사람 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웃음) 어머니가 교육을 잘하는 거예요, 못하는 거예요? 잘하는 거예요, 못하는 거예요?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야! 어머니로서는 교육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들로서는 말이예요, 아들로서는 입장이 다릅니다. 재소자들 가운데, 동료들 가운데 그것을 그냥 꾸려 가지고 나는 방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책에도 그렇게 씌어 있어요. 발이 떨어지질 않아요. 죽으면 죽었지 그걸 입에다 넣고 혼자 못 먹는다 이거예요. 그러니 이왕에 줄 바에는 여기서 너희들 실컷 퍼먹어라 하면서 주는 거예요.
(177-246, 1988.05.20)

8) 부모의 사랑의 위력

일생 동안 자식을 위해서 사랑의 줄을 매 가지고 사는 부모는 피땀을 흘리고 등이 구부러지고 외모가 아무리 비참해도 그 마음세계에 타오르는 소망은 아무도 꺾을 수 없습니다.
부딪히는 어려움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걸 뚜벅뚜벅 밟고 넘어갈 수 있는 위대한 힘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맞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175-209, 1988.04.17)

자기가 망하든 어쩌든간에, 흥망의 요건을 넘어서 가지고 책임질 수 있는 자리, 죽고 사는 문제를 초월해 가지고 책임질 수 있는 자리에서 남아질 수 있는 사랑의 계층이 도대체 인간사회의 어디이냐? 어디가 그 기점이 되겠느냐?
그것은 남녀지간의 사랑도 아니요, 형제지간의 사랑도 아닙니다. 나라를 위한 사랑도 아니요, 세계를 위한 사랑도 아닙니다. 그 자리를 찾고 또 찾아보아도 이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자리 외에는 없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세상에서 부자관계를 중심 삼은 사랑이 절대적이냐 할 때에 거기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중에서 제일 우위(優位)에 설 수 있는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문제를 중심 삼고 보면 그 사랑이 기원입니다. 우리 인간세상에서는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희로애락이라는 것은 정서적인 면을 중심 삼고 되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의 기점은 거기서부터입니다.
그러면 그 기점이 절대적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태어났느냐? 부모로 말미암아 태어났습니다. 그 부모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 하나님의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남성과 여성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이 아들딸인데, 그 아들딸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남성과 여성이 사랑하는 것과 같으냐 할 때, 그럴 수 있다면 그건 논리적인 모순이 됩니다.
그러면 이 사랑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 어머니는 하나의 남성과 여성인데, 이들이 상대적 관계하에서 사랑을 함으로써 아들딸이 태어났습니다.
그 아들딸을 중심 삼고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맺어졌는데, 거기에서 맺어진 사랑이 부부 사이에 맺어진 사랑보다도 강한 사랑으로 나왔다면 이것은 변증법적 논리를 긍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진화론을 긍정해야 된다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자식은 남성의 사랑과 여성의 사랑이 합해져서 나온 것인데, 합해져서 나온 그것이 강한 힘을 가졌으니 그것이 주체냐? 어떤 것이 주체냐?
자식이 강한 사랑을 가졌으니 거기에 부모가 끌려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부모가 주체 되는 입장에서 자식을 끌고 나가느냐?
이런 문제를 볼 때, 그 사랑이 남녀간에 맺어지는 사랑만으로 되어진 것이라면 그러한 사랑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더 강하고 더 원칙적인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48-149, 1971.09.12)

부모가 눈물을 흘리며 '내 사랑이 부족하여서 그렇다. 모든 것은 내가 너를 더 사랑하지 못한 탓이다.' 하면서, 그 자식의 골이 녹아나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자식 앞에 나서게 될 때에, 그 자식이 어떻게 돼요? 돌아서요, 안 돌아서요? 돌아서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은 약한 사랑을 전부 다 소화, 통합시킬 수 있는 주동성이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이다? 「있는 것이다.」 (48-179, 1971.09.12)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기가 배고픈 것을 참고 자식을 위해서 허리춤에 있는 그 먹을 것을 녹여 가지고 자식에게 주겠다고 하는 그 부모의 사랑 앞에는 천하가 머리를 숙인다는 것입니다. 천하가. 그 아들딸을 틀림없이 우주가 협조합니다. 천하가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나서 그 자식이 출세한다고 생각하지만 부모의 사랑이, 위하는 공덕이 거기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한때에 출세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잘나서, 잘생겨서 좋은 것이 아니예요. 위하는 사랑 앞에는 천하가 머리를 숙여요. 하나님도 거기에는 머리를 숙여야 된다구요.
(148-328, 1986.10.26)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칠 법이 없다구요. 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주가 보호하게 돼 있어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안고 좋아하는 그 자리는 이 우주의 법이 공격할 수 없습니다. 공격이 있을 수 없고 보호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몰랐다구요. 이걸 모른다 이거예요. (130-152, 1984.01.08)

9) 부모의 사랑이 귀한 이유

여러분, 부모의 사랑이 왜 귀하냐?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일생 동안…. 어머니는 90이 넘고 그 아들이 70이 넘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어도, 할머니가 된 어머니는 아들에게 '얘, 나가면서 버스 주의 해라. 복잡한데 잘 다녀와라' 하고 말합니다.
70년을 그렇게 하고도 지치지 않았어요. 그거 얼마나 길어요? 저나라, 영계에 가서 같이 살아도 영원히 지치지 않을 사랑이라는 거예요.
(139-103, 1986.01.28)

인간이 개인으로서 정서적인 문제를 중심 삼고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에 결론적으로 부딪치는 것이 무엇이냐? 부모의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현실적으로 세계에 전개될 수 있는 형성체가 있다면 그것은 국가를 형성할 수 있고,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정이 아니겠느냐? 어떤 국가나 세계든지 가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가정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가정은 무엇을 기반으로 해야 되느냐? 가정의 구성 요소인 개인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에는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왜 귀하냐? 자기 생명보다도 더 높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기 생명도 잊어버리고, 자기의 행복과 소원도 포기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들끼리 기뻐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기뻐할 것이냐?
옷이나 잘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아(孤兒)의 심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심 깊숙이 스며드는 정서적인 면에 있어서의 기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42-339, 1971.04.11)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몸뚱이와 마음이 따로따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하나. 그래서 귀하다는 거라구요. 그렇지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할 때는 몸과 마음이 하나된 것이 아니라구요. 몸과 마음이 하나 안 됐다구요. 다르다구요.
부처끼리 사랑하는 것도 역시 자기를 옹호하고 변명하는 데서 사랑하니까 하나 안 되는 거예요. 그렇지만 오직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생명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사랑을 중심 삼고 하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인간세계가 비록 타락된 세계이지만 부모의 사랑이 하나의 정서적인 뿌리가 돼 있더라 이거예요.
(61-255, 1972.09.01)

부모의 사랑을 왜 존중시하느냐?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극복을 추구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고 희생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결과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다 행복하다는 거예요.
주는 것으로써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받는 것으로써 행복한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도 복이 있습니다. 왜 복이 있느냐? 하나님편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46-34, 1971.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