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信仰生活)
신앙생활은 언제나 봄기운을 갖는 생활이다.
자고 깨고 오고 가고 주고 받는 전부가 하늘과 함께 거리낌없이 평화스러운 생각으로 하라.
통일교회의 식구로서 제일 안전한 생활방법은 일선에서 모든 십자가를 지고 넘어가는 길이다. 이것이 통일교회 신앙의 정도(正道)이다. 이 노정(路程)에서 효자(孝子), 충신(忠臣), 열녀(烈女)가 결정된다.
우리들이 스스로 살펴야 할 것은 자기 위치, 전후 관계, 가인 아벨의 원칙에 신경을 써야 한다.
아벨은 자기의 걱정도 맡았지만 남의 걱정까지 맡은 사람이요, 가인은 자기의 고통까지 남에게 넘기겠다고 하는 사람이다.
아벨이 되려면,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되고,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상(思想)을 가져야 되고, 전도지(傳道地)에 나가 그 사상을 실천해야 된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가인을 사랑으로 굴복시켜야 한다.
가인 아벨의 복귀는 서로 자진해서 고생하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하늘 앞에 나선다면 문제없을 것이다.
하늘을 중심삼고 애달픈 사람이 아벨이다. 덜 자고, 못 먹고, 더 수고하는 데는 불평할 자가 없을 것이다.
아벨이 되기 위해서는 가인 앞에 3대 시련(三大試鍊)과 3대 핍박(三大逼迫)을 받아야 된다.
‘나’라는 관념을 초월하여 속죄자(贖罪者)의 사명을 하고 선의 기반을 닦아라. 나는 개인이로되 역사적인 심정의 부활체(復活體)이다.
은혜는 동적(動的)이니, 정적(靜的)인 자기를 만들어서 큰 은사를 받아 소화시켜 나가자. 은혜받고 절도 없이 날뛰다가는 허전해지고 다 쏟아 버린다.
하늘 앞에 권능(權能)보다 지혜(智慧)를 구하라.
영적인 역사(役事)를 하는 순간을 비행기를 탄 것에 비유한다면, 그 가는 방향(=目的觀)을 정확히 하고 또 착륙할 수 있는 기지(=自己整備)가 있어야 한다.
입체적(立體的)인 생활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되자. 먼저 영적(靈的)인 승리의 기대(基臺)를 이루어 생활하라.
믿음보다 더 큰 힘은 없을 것이다. 왜? 하나님도 제일 무서워하시고, 따라서 역사(役事)하시니까…. 진실로 믿는 믿음은 거짓을 참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남이 몰라준다고 화내지 말라. 선생님은 ‘고난에 사무친 땅을 헤치고 나선 뒤에 하늘 보좌(寶座) 앞에 나갈 때 알아주십시오!’ 하고 아버지께 기도한다.
타락성을 해탈(解脫)하는 길은 천만 사람을 다 아벨같이 모시는 것이다. 대해 주는 가치를 몰라주면 그 사람의 복을 빼앗아 온다.
큰 소망을 가진 자일수록 오래 참는다.
은혜는 생명의 밑천이다.
눈을 뜨게 될 때 보는 것, 생각하는 것 전체를 하늘과 결부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회개하라. 첫말을 하늘을 위해서 하라.
회개하는 방법은 마음으로 안 되고 몸을 쳐야 한다. 몸을 치기 위해서는 몸이 싫다 하는 험한 길을 가야 한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이다. 험한 길을 가는 데는 깊지 않은 종교는 다 꺾인다.
죄는 역사를 점령하여 오고 있지만, 죄의 거점(據點)은 인간의 육신이다. 육신의 욕망을 극복해야 죄악을 물리칠 수 있다.
몸을 중심삼고 점령당하면 사탄세계요, 마음을 중심으로 점령하면 하늘이다. 양심은 하늘이 찾아오는 최일선(最一線)이다.
평화와 행복의 세계는 나중이다. 먼저 죄를 없애자. 죄를 없애지 않으면 평화와 행복의 세계가 쫓겨난다.
누구에게든지 조그마한 일이라도 선한 말로 기분좋게 대해 주어라. 열 번 하면 열 사람이 내 편이 된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좋다. 그러면 자기의 신앙기준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기도도 필요 없지 않겠는가?
우울한 표정을 짓지 말자. 항상 마음을 명랑하게 하라. 평화의 마음, 진실된 마음으로 갈 때 진실과 평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사랑·은사·구원이라는 말은 실제는 두려운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는 상극(相剋)은 있을 수 없고, 다만 상화 상응(相和相應)만이 있다. 성경에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기록된 뜻도 이런 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은혜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수습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한 시간 기도했으면 세 시간은 수습하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
신앙길은 뱃길과 같다. 노(櫓)를 젓는 것을 신앙생활에 비길 수 있다. 멈추면 곧 후퇴하는 것이다. 악한 사회에서는 어느 조건도 신앙 그 자체에는 직접적으로 협조될 수 없는 역경뿐인 것이다.
나를 책망하심은 나를 상대하고 있는 사탄을 책망하는 것이니, 나도 동일한 위치에서 나를 쳐야 한다.
타락성(墮落性)을 벗는 것은 순종 굴복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굴복하지 아니한 것과 천사장(天使長)이 아담에게 순종 굴복치 않은 것이 죄악역사(罪惡歷史)를 이루어 놓았으니, 이를 탕감복귀하는 길은 순종 굴복뿐이다. 순종 굴복은 제일 싫은 것부터 해야 한다.
신앙생활이 저울과 같다면 하루하루의 생활은 선한 무게를 얹어 점점 높여 나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있는 정성 다 바쳐 정성의 씨를 뿌리면 열매 맺는다. 정성들인 것은 정복당하지 않는다. 정성들인 것은 정성들인 자의 것이다. 정성의 기대는 결코 사탄이 빼앗지 못한다.
죽을 때 최소한도 자기 스스로 자기를 비웃지 않게 하자.
열매가 맺기 시작하면 꽃잎은 떨어진다. 마찬가지로, 마음 속에 신성(神性)이 성장하면 모든 약점은 떨어진다.
자기를 위주로 하고 자기가 동기가 될 때는 5퍼센트의 책임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위주로 하고 하나님이 동기가 될 때에는 5퍼센트의 책임이 필요 없다.
자기들끼리 의논해서 잘 되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못 선다. 보고와 연락으로 하나님 앞에 상달되고 인정되어야 한다. 항상,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조성해서 일하고 생활하라.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생활하면 80퍼센트는 맞는다.
안타까운 하늘의 사정을 아는 자라면 회개하기 전에 몸둘 곳을 모르고, 자신의 부족함에 눈물 흘릴 것이며, 아버지라 부르기 전에 통곡할 것이다.
아무리 원수가 나타나더라도 분하게 생각지 말라. ‘너(원수)는 분함을 가지고 나타나지마는 나는 내 생애노정(生涯路程) 중에 승리할 한 페이지를 기록할 재료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마음을 가지자.
허위(虛僞)의 탈 속에 자기를 감추지 말라. 사탄에게 공격당하는 좋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나 하나를 놓고도 나를 위하는 사람, 나 대신 탕감받는 사람, 나를 반대하는 사람의 세 부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루의 생활도 선의 편에 기울어져 있는가를 항상 반성해야 한다.
은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 앞에 있다.
천한 자리에 떨어져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으면 돌아간다. 극(極)과 극은 먼 것 같지만 서로 통한다. 사탄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본심(本心)이 움직일 때 이는 아벨(善)적이니, 그 본심이 즐기는 방향을 잃지 말고 나가라.
자탄(自歎)의 신음소리가 나는 세계가 곧 지옥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 나를 믿어 주신 내적인 인연이 있었기에 내가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미안하고 송구하게 생각하면서 뜻 대해 믿고, 사랑하고, 충성하라. 만일, 뜻을 품고 후회(後悔)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이상세계(理想世界)에서 존재기대(存在基臺)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진짜 보물은 마음 속에 두는 것, 그러기에 최고의 귀하신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는 것이다.
은혜라는 것은 세상을 구(救)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자기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성을 들인 이상은 욕심을 부리지 말라.
우리는 땅(聖地)을 위하여, 집(聖殿)을 위하여, 식구(祝福家庭)를 위하여, 부모를 위하여 정성을 들이자.
죽더라도 믿고 죽고, 망하더라도 믿고 망하자.
얻은 것도 모르고, 잃은 것도 모르는 자에게는 더 이상 권고가 필요 없다. 우리의 역사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데서부터 이루어졌다.
전체 앞에 플러스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플러스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한 일을 하고는 절대로 기억하지 말고, 신세진 것은 절대로 잊지 말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 함께 모이고자 하는 마음, 함께한 방향을 취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귀하다. 그 마음을 하늘 앞에 바쳐야 된다.
은혜를 주었는 데, 거기에 대한 정성을 들이지 못하면 그 은혜를 몽땅 거두어 간다.
적선(積善)이라는 것은 남에게 주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자기는 생각지 않는데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사람을 많이 가지면 그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최고의 권위의식에 오른 개인이나 사회는 망하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서는 내려올 준비를 하여야 한다.
여러분은 모심(侍義)으로써 구원(救援)받는다는 것을 얼마나 실감(實感)하고 생활하느냐?
신앙길은 살아서 죽음길을 가는 것이다.
인간은 최고의 것을 원한다.
남에게 보여 주어서 ‘너희도 그렇게 되라’는 뜻에서 자랑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생사문제(生死問題)를 초월(超越)할 수 있는 힘의 주체성(主體性)을 가진 것이 종교이다.
천사장(天使長)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고, 완성한 아담 해와로부터도 완전한 사랑을 받아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사탄은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반항하면서 나왔고, 하나님도 그것을 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완전히 버릴 때에는 사탄이 취한다. 끝날에 제일 불쌍한 자는 주(主)를 믿고 따르다 주님으로부터 심판받을 신도들이다. 신랑(新郞)을 믿고 살아오다가 그로부터 버림받는 신부(新婦)가 얼마나 불쌍한 것이냐!
신앙생활은 모험의 길이다. 남들이 못 하는 일을 해 놓아야 역대의 하늘 족보(族譜)에 남을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화합(和合)한 후에는 필요없는 명사이다.
기독신자가 많다고 자랑하지 말라. 오늘날의 기독신자는 예수님을 태우고 천국가겠다는 자는 없고, 전부 예수님의 등을 타고 천국가겠다는 욕심쟁이들 뿐이다.
미래적인 부활의 가치를 보유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생활은 매지 말고 풀어 나가라.
신앙생활은 남이 감득(感得)하지 못하는 가운데 홀로 감사하는 생활, 홀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나는 죄인입니다. 나에게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하며 슬퍼하고 회개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다 잃으면 신앙생활을 해 내지 못한다.
새로운 마음을 가지자. 신앙은 언제나 즐거워해야 되고 감사해야 된다. 기도하고, 기뻐하고, 항상 사랑이 솟구치는 마음이 새로운 마음이다.
신앙의 목적은 지상에서 사망을 밟고 서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의식이 희박하면 신앙생활을 힘있게 못 한다.
죽음의 주인은 누구냐? 그리고 생명의 주인은 누군가? 세상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생명의 주인은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의 참된 주인인 하나님을 알아 모시고, 죽음의 주인을 현실 속에서 찾아서 정복해야 한다. 그리하여 죽음이 점령한 곳을 정리하여 그곳에 생명의 깃발을 꽂아야 한다.
죽는 순간에 한(恨)을 남기지 말자.
지상에서 세 사람 이상의 원수를 맺고 가면 천국을 못 간다. 땅에서 다 풀고 3일 이상 기도해 주어야 한다.
죽음과 싸워서 승리하는 길을 가는 것이 종교인이다. 잠자리에 들 때에도 이것이 내가 마지막 병상(病床)에 눕는 순간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뜰 때에도 이것이 내가 영계에 들어가 첫눈을 뜰 때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분은 한시도 죽음에 대한 문제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죽음은 본고향(本故鄕)을 찾아가는 길이다. 가는 데 있어서는 무엇을 선물로 가지고 갈 것인가? 이러한 일을 한번 생각하면 촌분(寸分)도 허송할 수 없는 것이다. 영계에 가서 합격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우리 교회의 교육 목표이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최후의 담판기도를 세 번은 하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사망선(死亡線) 앞에 멋진 승리의 결정을 짓고 넘어갈 것인가? ’ 하는 문제를 놓고 늘 기도해야 한다. 아버지가 계시는 본향에 대하여 얼마나 생각하여 보았는가? 우리의 원인(原因)이 그곳인데…. 타락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영원한 생명문제를 걸레 조각만큼도 생각지 않으니, 누가 존중해 줄 것인가?
모든 사람은 각자의 심령상태(心靈狀態)에 해당되는 영계에 가 머물게 된다. 영계에 가게 되면 보통사람은 열두 고개의 시험을 거쳐야 되고, 공이 많은 사람이라도 세 고개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 첫째, 영계에 가면 땅에서 자기의 가장 원수였던 자가 나타난다. 둘째, 역사적인 원수 인 사탄이 나타나서 ‘너의 조상인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가 이렇게 충성했고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으로 가르쳐 주었는데 너는 그 말씀과 하나되었고 그대로 실천하였는가? ’ 하면서 참소한다. 셋째, 천사세계(天使世界)의 시험이 있다. ‘우리의 도리(道理)와 법도(法度)는 이러한데, 너는 그와 같은 충신의 도리를 세워 나왔는가? ’하는 시험이 있다. 그다음에야 주(主)의 자녀의 고비를 넘기기 위하여 예수와 성신의 문답(問答)이 있고, 이것을 넘어야 완성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점점 더 클클해 못 견디는 것은 몸뚱이 없는 영과 같은 것이니 실적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면 은혜는 떠나고 만다.
은혜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한 번 기도한 것을 열 번 이상 실천하는 데 있다.
신앙의 길에는 신앙의 참 동지가 필요하다. 서로가 의지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을 가져 주위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부럽게 생각하게 되면, 하늘의 뜻은 자동적으로 번식되는 것이다.
신앙자는 언제나 새로운 마음이 생겨야 발전한다. 아침도 새롭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신앙생활은 호흡을 하듯이 항상 평온하고 정상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데도 나는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다는 금(線)을 그어 놓고 대인(對人), 대사회(對社會)의 활동을 해야 한다.
하늘을 사모하기를 아픈 것을 잃어버릴 정도로 사모하고 생각하면 병도 낫는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가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어도 그가 은혜받은 사람일 때 그를 앞세워 시대적 탕감역사를 시키더라도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섭섭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죄를 다스릴 줄 알고, 자기를 평화롭게 다스릴 줄 알고, 사탄을 자연 굴복(自然屈伏)시킬 수 있어야 하늘 사람이 될 수 있다.
역사(歷史)를 품고, 우주(宇宙)를 품고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를 흘려야 한다.
정성들이고 나서 후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천법에 걸리는 일이다.
선생님을 위해서 정성들이려면 선생님이 사랑하는 나라와 인류를 위해서 정성들인 다음에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실적을 가진 다음에 정성들여라.
죽을 때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이 뜻 앞에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 뜻을 못 이루고 가는 것을 황송하게 생각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오는 것은 세상에서 할 일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다하고 나면 아무런 공포도 오지 않는다.
예배시간에 늦게 나올 때면 고개를 못 들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나오라. 참소를 피하는 길은 죽도록 고생하는 길밖에 없다. 뜻을 위해 죽겠다고 각오하고 눈물짓고 있는데, 어느 누가 참소하겠는가?
여러분은 뜻을 중심삼고, 복귀의 책임을 지고 단 몇 달이나 싸워 보았는가? 이 길은 선생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허덕이든가, 일선(一線)을 따라가기 위해서 허덕이든가 하지 않으면 못 갈 길이다.
아침에 웃으면서‘아버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밤에 또 웃으면서 ‘아버지!’ 하고 잠들어야 한다.
세밀한 부분까지 아버지와 의논하면서 사는 아들이 효자이다. 부모의 손을 꼭 잡고 가야 한다.
나를 낮게 보고 세상의 모든 죄악은 나로 인하여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대하여 근심하며 통애하는 마음을 갖고 모든 책임을 도맡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자.
예수를 믿을 줄을 알면서 예수의 마음을 몰라서는 안 된다.
역사를 지배하고 나오던 인간의 이념과 천적인 이념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나온 것이 종교생활이다.
천륜적인 창조의 이념을 생활적인 면에 실천시키기 위하여 6천 년간 하나님은 섭리해 나오신 것이다.
원수 사탄까지 환영해서 복을 빌어 주라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예(禮)라는 것은 전후 좌우가 갖추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신앙인은 부끄러움의 눈물과 감사의 눈물과 기쁨의 눈물, 이 3대 눈물을 흘려야 한다.
절대적인 신앙은 운명을 혁신할 수 있다.
아무리 수고를 하고 실적을 거두어도 아버지와 함께 해야지 나 혼자 하면 사탄이 가져간다.
모심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것을 얼마나 실감했느냐?
가정을 위해서 주고, 나라를 위해서 주고, 세계를 위해서 주자.
도(道)의 목적은 자기 완성을 해 가지고 무한한 사랑을 느끼고, 그것으로써 무한한 행복을 누리자는 것이다.
도의 길은 심정(心情)의 세계에서 그리움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한 번밖에 없는 생애에 왜 빚지고 가는가? 빚을 지우고 가야지!
자신의 환경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하늘이 같이하신다.
벌받는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위해 기도해 주어라. 저주받는 자에게 저주하면 오히려 저주받는다.
양심작용의 목적은 하늘의 완전한 자녀의 입장에 도달케 하기 위한 것이다. 양심의 안식처를 찾아야 한다.
통일교회의 식구는 눈물과 땀의 연결 속에 살아야 한다.
양심을 붙들고 살 것이 아니라 양심의 터전을 개발하여 살자.
신앙의 길은 반드시 입체적인 세계만을 중심삼아 가지고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상대적 여건을 갖추어야 완성된다.
하늘 앞에 가까이 서 있는 자리는 지극히 무서운 자리이다.
‘하나님, 당신만은 아시나이다!’ 할 수 있는 자리, 이것은 인간의 귀결점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셨다면 어떤 기준 밑에서 사랑하셨을 것인가? 생각해 보았는가?
신앙생활의 기준은 메시아이다. 메시아를 닮는 것이 신앙이다.
울음과 통곡으로 가실 때 당한 메시아의 고통을 인계받기 위하여 골고다를 따라가는 길이 신앙의 길이다.
여러분은 6천 년의 혈통적 죄의 결실체다. 6천 년 죄악사의 전시품이다. 세포에는 6천 년의 죄가 얼클어져 있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졸지 말라. 쉬지 말고 기도하여 겟세마네 동산을 지키는 자가 되자.
나는 죽더라도 한 부분은 남겨 놓고 가야 한다. 죽더라도 내 머리카락 하나라도 성전 가까운 데 떨어뜨리게 해 달라고 해야 한다.
이 땅을 떠날 때 무엇을 갖고 갈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단 하나의 존재가 되는 것은 바로 갖고 갈 것을 마련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단 하나의 존재가 되면 가정의 복을 받고, 국가에서 단 하나의 존재가 되면 국가의 복을 받는다.
하늘이 나를 이런 자리에 세워 준 것은 하늘의 슬픔을 주고 사 온 것이요, 하늘의 슬픔을 주고 바꿔 온 것이요, 하늘의 슬픔을 주고 찾아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를 통하여 하늘을 위로해 드릴 수 없겠느냐고 하면서 몸부림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일을 당하면 그것을 내 것으로 해결하지 말고,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해결하실까를 생각하면 답이 저절로 나온다.
동서양이 밤 낮이 다른 것을 생각해 봤다. 다 자면 사탄이 점령할지도 모르니까 자는 사람을 마음놓고 자게 하기 위해 동서반구를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때도 있었다.
통일교회에 들어올 때의 기쁨보다 그 이상의 기쁨을 가져야 정상적이다.
지금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이것이 문제이다.
일주일 절약하고 계획했다가 우리 식구들이 기뻐할 수 있는 무엇을 주는 날이 주일이다.
신앙에서 힘이 안 나는 것은 하나님의 내적인 임재지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지 혹은 임재점과 일치되어야 한다. 중심에 관한 관심이 우주보다도 더 크다면 하늘은 떠나지 않는다.
잘 믿자! 잘 믿자는 것은 아들 딸을 사랑하고 세계를 잘 사랑하자는 것이다.
끝날의 성도들은 성인들이 하지 못한 일들을 다 완성하고 가야 한다.
솔직하다는 말은 곧게 거느려 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솔직한 신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곧게 거느려 가야 한다.
변명하는 것은 자신이 목적하는 길 앞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며 상관없는 종착점에 귀결된다. 열만한 죄를 지었다고 보았을 때, 자신은 백만한 죄책감을 가지고 감히 하늘 앞에 나타날 수 없다고 할 때 하늘은 열만한 충성으로 봐 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는 변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더욱 솔직해야 한다.
개척자는 부딪치는 시련과 고통 앞에 불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앙하는 것은 인생개척이니, 신앙생활에 있어서 불평하는 것은 개척자도 아니요, 신앙하는 사람도 아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는 발전이 있는 것이요, 희망이 없게 될 때는 정지 아니면 후퇴일로에 있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곳은 정지가 있는 것이요, 희망이 있는 곳에는 발전이 있다. 그러므로 불행과 행복은 희망에 좌우된다. 내일의 희망을 바라고 나가는 신앙자에게 희망이 사라진다면 그는 지극히 불행하다. 그것은 껍데기 신앙이다.
개척자에게 부딪치는 모든 일들은 생소한 것들이기 때문에 심각한 자리에서 비판 분석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체험을 시킬 때 그것이 하나님이 좋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절대적인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소망을 연결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되겠기 때문에 영적인 체험을 시켜 주시는 것이다.
절대적인 신앙은 자기를 긍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를 주장할 수 없는 부정의 자리이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 생활뿐만 아니라 그다음에 느껴진 사실이 상대적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는 것이냐 하는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지식은 생명을 지배하지 못한다. 오직 종교만이 생명을 주관할 수 있다.
의사가 되는 것은 남을 살려 주기 위해서 되는 것과 같이, 내가 예수 믿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을 천국 보내 주기 위한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 하는 일을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남을 위해서 일할 때 좋은 일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편한 사람부터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고생하는 사람부터 구원해야 하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고생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신앙의 생활은 자기 일신을 위한 생활이 아니라 팔려 간 종의 생활과 같다. 왜냐하면, 종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종으로서의 생활을 거쳐 가지고 비로소 주인의 인정을 받아야 주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길잡이를 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 앞까지는 길잡이가 되지만 방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하나님이 가는 길은 개척의 길이요, 신앙자는 따라가는 길이다.
신앙길은 오랜 기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루가 문제인 동시에 그 하루의 한 시간이 문제이다.
신앙은 말씀을 통한 하늘과 인간과의 계약이다.
신앙은 배고픈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래 가지고 항상 부족한 모습인 것을 자인하며 가야 불평 불만이 없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지치게 되면 밀어주는 사람이 되라.
나무가 마르게 되면 일시에 말라죽는 것은 아니다. 마르는지 안 마르는지 감각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사망으로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정통의 신앙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다. 슬픔의 눈물, 황공한 눈물,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이것이 심정의 터전을 개발하는 것이다.
신앙길에 있어서 꼭대기에서 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면, 옆에서라도 줄을 붙잡아 줄 수 있는 사람과 밑에서 받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신앙의 동지가 필요한 것이다.
끌려가지 말고 앞장서서 가자.
젊어서부터 깊은 신앙의 터전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 신앙생활에서 한번 힘을 잃어버리면 다시 그 길에서 소생할 수 없다.
신앙길은 마음 속으로 천 번 만 번 다짐하고나서 가야 한다. 상상봉을 돌파하기 위해서 재료를 수집하는 기간이 신앙생활이다.
생활을 통하여 신념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명령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야 할 길을 대신 선생님이 명령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해야 한다.
신앙자는 타격을 이겨야 한다. 타격받을 일이 있을 때는 ‘내 때가 왔구나!’ 하고 생각하고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