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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心情)

심정으로 빚지면 그때부터 말려든다. 하늘이 보게 될 때 동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서야 한다. 나 하나 희생시켜 전체를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하늘을 대하라.

진리(眞理)의 말씀은 문을 여는 것, 그 다음에는 심정(心情)으로 길러 주어야 한다.

심정은 소망이며 목적이고, 사정(事情)은 생활이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생활을 펼쳐 나가자.

하나님이 찾아오신 마음의 터를 인계받아 나가자. 하나님은 거짓으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골수 중의 골수의 심정을 갖고 찾아오신다. 나의 피살에도 이런 심정이 사무쳐 있어야 한다. 이런 원칙적인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식구는 많을수록 혼란을 일으킨다.

선한 사람은 자연을 보나, 사람을 만나나, 어디를 가나, 어느 때나 심정으로 덮어 줄 수 있는 자다.

하늘이 대할 수 있는 참신하고 자극적인 맛을 풍기는 심정적인 재료를 항상 제시하라.

심정세계에는 발전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를 반복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세계이다.

심정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다. 심정의 골짜기의 길은 고통스럽고 처참한 길이다. 심정의 골짜기는 파고들면 들수록 눈물이요, 또 자기는 없어진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온 땅의 곳곳에 다 가고 싶어하신다. 가시는 데는 자녀가 정성의 터를 닦아 기다리는 곳으로 가시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늘 자녀로서 땅끝까지 개척하여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진모(眞貌)를 알기에 힘쓰라. 그다음에는 ‘아버지!’ 하고 부르기만 해도 통곡하는 선생님을 배워라.

사랑의 주인공, 심정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자. 아무리 위인(偉人)이 나온다고 하여도 인류의 심정을 정복 못하면 소용이 없다.

타락 이후 섭리해 오신 하나님과 인연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락 전의 하나님과 심정의 인연을 맺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지식(知識)의 스승을 요구하기보다 심정의 스승을 요구하라.

선생님이 여러분을 대함은 일의 성패(成敗)의 문제로서가 아니고 그 심정적 동기가 어떠한가를 보고 대한다. 즉 자기 중심이냐, 하나님 중심이냐가 중요하다. 심정적 기준이 하나님이 세운 것과 같으면 문제는 다 해결된다.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그로부터 창조되었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과 부자지인연(父子之因緣)이라는 것을 마음과 몸으로 체휼하게 될 때 하나님의 심정을 느껴 볼 수 있다.

심정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것을 실생활에서 사무치게 느껴 생활하는 자가 아니면 타락성(墮落性)을 벗을 수 없다.

하늘의 심정을 중심삼고 움직이는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심정으로 무장된 생활을 중히 여겨라. 나보다 심정적인 사람은 나의 아벨이다.

말씀시대나 실체시대는 대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심정시대는 대신이 없다.

말씀의 목적은 실체요, 실체의 목적은 심정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할 때 하늘의 심정을 전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하며, 말씀을 듣는 사람도 그 말씀을 통하여 하늘의 심정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끝날에 있어 종교는 심정종교(心情宗敎), 철학은 심정철학(心情哲學), 주의는 심정주의(心情主義), 사상은 심정사상(心情思想)으로 각각 해명되어야 한다.

심정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종교는 하나님이 제일 불쌍한 분이라는 것을 실감(實感)있게 가르쳐 주는 종교이다.

때가 요구하는 심정 앞에 먼저 선 자가 그 심정을 잃으면 늦게 들어오더라도 그 심정기준이 된 자를 불러 쓸 수밖에 없다.

심정의 왕자가 못 되면 권세의 왕자도 못 된다.

복의 영원한 고향은 하나님의 심정이므로 하나님의 심정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사람이 되어야 그곳에 하나님의 복이 운행한다.

경천(敬天), 인화(人和), 애지(愛地)의 내적인 심정기준이 흔들리지 않는 자가 복된 자이다.

모심의 생활을 통하여 하늘을 반하게 하는 자는 언제나 하늘이 지도해 준다. 이런 아들 딸이 하늘의 눈동자이다.

사랑은 주고 잊어버려라.

사랑은 작용(作用)하면 할수록 커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서만 영생이 나오는 것이다.

선(善)한 사람의 길은 극복(克服)해 가는 생활이다.

인간이 최고의 것을 바라는 것은 본래 최고의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앞에는 높고 낮은 것이 없다.

항상 하늘 앞에 목메이는 때가 많아야 한다.

사랑의 뿌리는 하나님이다.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이 완전히 하나가 되면 그 중앙에 하나님이 임재(臨在)하신다.

소원의 일치와, 사정의 일치가 되어야 심정세계가 벌어진다. 심정의 원천이 될 자료(資料)를 가지자.

하늘 앞에 지성(至誠)을 드리는 것은 남으로부터 듣거나 배우거나 끌려서 되는 것이 아니다. 자동적으로 심정에서 우러나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忠), 효(孝), 열(烈)은 가르쳐 주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정성(精誠)을 다해 가지고 하나님의 신세를 지지 않고 오히려 신세를 끼쳐 드리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나가야 한다.

주기에 굶주린 자가 되자. 절대로 신세지지 말라.

심정을 유린(蹂躪)한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요, 사탄도 죄악시(罪惡視)한다.

심정을 중심삼고 그 인격 앞에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가지신 심정과 선생님이 가진(하나님에 대하여) 심정 사이에는 무궁(無窮)한 차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선생님은 가도 가도 새롭고, 지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성품을 흡수할 수 있는 소성(素性)을 갖추어야 한다. 부활은 사랑의 봄동산에서 모든 세포(細胞)가 녹아나는 것 같은 깊은 사랑의 인연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심정을 유발(誘發)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정성들이는 것이며, 3대(三代)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들이면 하나님이 같이하시어 그 후손이 망하는 법이 없다.

자기의 자식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한 자기의 쓰라림보다 하늘 아버지의 쓰라림이 어떠하겠는 가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심정을 가진 자에게는 하늘도 꼼너희들의 형님을 본받아라!’ 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은 심정 문제다.

심정은 생명의 원천이다. 이것은 그대로 영계에 직결된다.

나는 너희들과 같지 않다는 심정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하늘의 애달픈 심정을 대신하여 서러워하던 것의 세 배 이상의 애달픈 마음을 가져라.

하나님의 심정에는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잃어버린 슬픔과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선지 선열들을 보내어 사탄과 싸우게 하신 역사적 슬픔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도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생애를 바쳐 싸우고 죽었으니, 우리도 예수의 심정을 대신하여 증거하고 싸우며 죽는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어머니를 찾는 어린아이의 심정이 있으면 하늘길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갈 수 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할 때 느꼈던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적 내연(內緣)을 능가해야 기쁨이 있을 수 있다.

완전한 사랑은 준 후에도 기억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자리이다.

모든 문제를 아버지의 심정에 걸어 놓고서 생각하면 풀리지 않는 것이 없다.

상대기준(相對基準)이라는 말은 심정을 두고 한 말이다. 완성이라는 것도 바로 심정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다.

고통의 사정을 알리고 싶지 않고 슬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늘은 덮어 내려오신 것이다.

통일 신도가 가져야 할 오직 하나의 소유관념은 하나님의 심정이다.

세상의 일은 적당히 넘어갈 수 있지만, 심정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안된다.

향수(鄕愁)와 같은 심정의 역사를 꾸며 놓자.

사랑의 근본은 부자지정(父子之情)의 종적인 사랑과 형제지정(兄弟之情)의 횡적인 사랑이다.

심정의 경지에서는 잘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못난 사람이 없다.

심정의 세계는 시공(時空)을 초월한다. 말씀도, 기도도 궁극에는 사랑이다.

주체는 심정적으로 나보다 더 뜨거운 사람이다.

식구로서 식구를 알지 못하면 망한다.

선생님은 하루에 세 번 이상 눈물을 흘렸다. 눈물로 엮어진 역사이기에 눈물로 씻어야 한다.

선생님이 받은 사랑의 기준을 찾기 위하여 잠을 자지 못하고 발버둥쳐야 한다.

심정의 기반이 없으면 불행한 자이다.

제일 가까울수록 흠을 잡을 수 없는 것이 철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자.

슬픔에 처한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 이상의 슬픔을 당해 본 사람만이 가능하다.

내적으로 숨어서 그 누구도 모르게 가슴이 메어지듯 아픔을 느끼면서 전체가 동정을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잠을 깨고 잘 수 있는 생활의 무리가 되어야 한다.

선생님은 본부에 있지만 전국 전지방을 다 돌아보고 싶고, 뿐만 아니라 전세계와 천상까지 다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다.

천지간에 얽힌 심정을 개척하여야 할 것이 도(道)의 길을 가는 사람의 일이다.

끝날에 처한 모든 사람은 최고의 빚쟁이요, 고독자요, 슬픈 자이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심정뿐이다.

모든 참이란 명사에서는 심정을 빼 놓을 수 없다. 참효자란 심정을 걸어 놓고 하는 말이다.

눈물을 흘리되 찾기 위한 눈물이 아니라 주기 위한 눈물을 흘려야 한다.

하늘이 보여 주고 땅이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천지의 심정적인 인연을 가지고 지어진 ‘나’이다.

심정적인 세계는 평등이다. 천국은 가정의 확대요, 형제애(兄弟愛)의 세계이다.

‘너하고 나하고 같이 살고, 같이 말하고, 일하고 싶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이다.

나라를 사랑하고 싶거든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싶거든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는 이념과 충성과 행동으로 인류의 마음을 정복해야 한다.

심정적인 기준을 중심하고 경제적인 기준과 문화적인 기준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 가지고 세계적인 주체성의 공인을 받아야만 비로소 이상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후손들이 추모할 수 있는 원천이 되어야 한다. 남겨 줄 것이 있다면 아버지의 심정과 그것을 사모하는 사랑이다.

제일 큰 산이나 강 또는 지역을 자랑하는 나라가 있을지 모르나,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하지 않고 사탄이 좋아하는 심정과 일치한다면 하늘이 좋아하시겠는가?

통일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운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이 앞에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계셔야 한다.

예수님은 비참한 가운데서 미래에까지 뻗쳐 있는 벅찬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갈 수 있었다.

역사적인 모든 실수를 내 실수로 하여 회개하고 자복하지 않으면 역사적인 내정적 심정을 상속받을 수 없다.

언제 내가 하늘의 일을 위하여 허둥지둥하는 길을 걸어 봤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부부가 늘그막에 외아들을 낳다가 죽인 그 심정 이상의 마음이 하늘의 입장이다.

선생님은 청소년 시기에 이미 소원의 표준을 세우고 결심했다. 슬픈 것은 청소년 시대에 완성하여 에덴시대에 불려지지 못했던 아버지를 부르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말고,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을 한탄해야 한다.

인연의 세계를 창건하자.

개인의 눈물은 개인에게 그치지만, 중심자의 눈물은 역사와 더불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주님을 사랑했던 것보다 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랑을 중심삼고는 동등해진다. 사랑을 중심삼고는 주관하고 주관당한다. 사랑은 만인의 희망의 기점(起點)이다.

심정적으로 연결된 사람이 믿는 사람보다 앞선다.

심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라. 동심이 되어 부모의 품에 품기는 심정을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

나가서 잘해서 선생님의 칭찬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심정문제를 어떻게 인연 맺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이다. 민족이 잘못해도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한다.

선생님을 하늘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일을 했다.

선생님은 천 년 후의 일을 위하여 기도한다.

효자는 부모 앞에 가장 좋은 것을 갖다 드리면서 더 좋은 것을 드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부모 앞에 두 자식이 있는 데, 동생이 잘못해서 매를 들었을 때 형이 말리면 매를 놓을 수 있다. 우리는 형과 같은 입장에서 인류에 대하여 매를 놓으시게 해야 한다. 못 하는 동생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못 하는 동생의 몫까지 다 할테니, 손을 거두소서!’ 할 수 있어야 한다.

선생님은 외적인 일에 관심을 갖는다면 여러분은 내적인 선생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닮아야 한다. 하나님의 심정은 세계에 심어져 있다. 그러므로 세계인을 사랑해야 한다.

심정을 점령하는 날에는 몸은 풀어놔도 꼼짝 못한다. 하나님의 심정을 점령하자.

하나님은 만민을 미친 듯이 사랑하고 싶은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사람을 미친 듯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을 중심삼고 인류의 조상으로 온 분이 메시아이다.

영계는 사랑의 세계이기 때문에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것이다.

‘나보다 너의 자녀를 더 사랑하라!’는 최후의 유언을 하는 조상이 최고이다.

사랑은 맹목적인 돌파력이 있다. 종교는 사랑의 길이기에 생사를 초월할 수 있다.

하나님의 소원 성취는 심정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사탄의 참소조건에 걸리지 않아야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로 세워 명령할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재산을 못 가진 사람이 아니라 아내와 자녀를 갖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쌍하다는 것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갖지 못한 것이요, 사랑할 수 있는 자녀를 갖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하늘의 슬픈 사연이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 나오시는 것이 하나님이요, 또 종교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복을 받아 가지고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야 복을 주신다. 지금까지의 종교인들은 자기를 위해 복을 받으려 했기 때문에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복을 주시지 않았다.

여자들은 감성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위로할 수 있다. 여자로부터 타락되어 한이 맺혔기 때문에 이 한을 여자들이 풀어 드려야 한다.

심정의 기틀은 가정에 있기 전에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사랑의 근거지는 하늘이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사랑은 극복과 희생이 동반되어 있는 것이다.

사랑은 새로운 미(美)를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인물이 문제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의 주체이시요, 사랑이 지극히 많으신 하나님이 사탄을 용서하지 못하시는 것은 사탄이 사랑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생명보다 귀한 것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관은 창조의 권한을 갖지 않고는 안 된다. 그런데 창조의 권한은 권력이나 경제로써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되었기 때문에 세계는 사랑으로써만 주관할 수 있다.

사랑은 통일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통일시킬 수 있다.

예수는 사랑했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사랑했느냐 하고 묻는 자리에 섰고, 사랑하려야 할 수 없는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원수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니다. 원수의 입장에서 사랑으로 돌리게 될 때는 도리어 귀감이 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길이 있다.

선생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거든 삼천만 민족을 붙들고 선생님 대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통일교회의 식구들이 가야 할 길이다.

승리의 날을 맞아 기뻐하고 찬송하는 사람보다, 그날을 맞게 되면 땅에 얼굴을 대고 통곡하는 무리들을 하늘은 더 찾게 될 것이다.

자식들이 책임 못해서 죽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것을 보고 극복해야 할 하늘이 얼마나 불쌍하다는 것을 알고 슬픔을 위로해 드려야 한다.

심정이라는 것은 사람을 알아만 가지고는 느낄 수 없다. 심정을 알려면 같이 사랑하고 살아 봐야 아는 것이다.

부모 앞에 효자의 한 마디 반항의 말은 불효자의 천 마디 반항의 말보다 상처가 크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자는 것이 인간 창조의 동기이다. 사랑은 지식을 초월해 있다.

사랑의 자리는 동등이요, 평등이다.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인간이 무한한 사랑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도달하려는 본성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슬픔을 알고 출발하는 자리는 쓰러져도 죽지 않는다.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시켜 주는 것은 되지만, 그것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는 없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체휼해야 한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다려 주세요!’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줄은 내려 줄 수 있어도, 떨어져 내려간 곳까지 직접 가서 끌어내 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려 준 종교의 줄을 잡고 스스로 힘을 다하여 매달려야 한다. 그것이 심정이다. 그 심정이 얼마나 간절하냐에 따라서 거리가 가까워질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과 부모의 심정과 개인의 심정이 직선상에 서야 한다.

우주의 근본은 인간이요, 인간의 근본은 생명이요, 생명의 근본은 사랑이요, 사랑의 근본은 하나님이다.

사무친 정(情)은 법(法)을 넘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