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활의 재발견
1)어떻게 생활해야 되느냐
우리 인간생활에 있어서도 일생을 살려면 프로그램을 짜야 된다구요. 그저 무질서 무목적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오늘날 복귀섭리가 그냥 그대로 무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선생님이 40년 동안 걸어 나온 것이, 여러분들은 아무도 못 따라 나왔지만, 전부 다 계획적이예요. 프로그램에 맞춰 가지고…. 집을 지을 때 설계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블루프린트(BLUEPRINT;설계도)가 있어 가지고, 그 블루프린트에 딱 맞아떨어져도 자기만 '됐다' 해서는 안 된다구요. 하늘땅이 볼 때에…. 감별이라는 게 있어요. (141-180, 1986.02.22)
사람이 살다가 죽고 난 후에는 반드시 사는 동안에 잘살았느냐 못살았느냐 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살고 갔느냐 못살고 갔느냐 하는 그 둘 중 어느 한편으로 결정을 지어 놓고 간다는 것입니다. 잘살고 갔다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는 말이요, 못살고 갔다 할 때는 악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잘살았다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잘살았다고 하는 기준은 무엇이고 못살았다고 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우리는 생애를 걸고 잘살고 못사는 것을 결정하는 일들을 하며 생활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다 잘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못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가만히 보게 되면, 외부적인 요인을 보고 그 사람 참 잘산 다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보통 잘사는 사람이라고 하게 되면 외적으로 남부럽지 않을 만한, 집을 갖고 있고 돈냥이나 가지고 있고 남편과 아들 딸과 함께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을 만한 환경을 갖추어 놓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적으로 아무리 잘산다는 말을 들으면서 생활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과연 참된 생활을 하고, 내가 과연 선한 생활을 하고 있느냐'하고 마음으로 묻게 될 때, 자신을 갖고 '나는 참되게 산다'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느누구나 하나같이 참되게 살기를 바라고 있는데 참되게 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참되게 살기를 원하고 있지만 참되게 살 수 없도록 되어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대다수의 인간이 살고 보니 후회의 결말에 부딪히게 되고 일생을 헛살았다고 탄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생활양식인 것입니다. (43-236, 1971.05.01)
오늘날 통일의 젊은이들, 여러분은 자칭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역사적인 결실이다'라고 합니다. 과연 그러냐? 문제입니다. 과연 그러냐? 갑이라는 사람을 두고 '넌 뭘하느냐?' 하면 '나는 산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면, '이렇게 살아왔다'고 할 것입니다. 개인을 두고 대다수의 사람에게 '너는 어떻게 지내왔느냐'하면 '밥을 먹고 살아왔다'고 할 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사느냐? 잘사느냐, 못사느냐?' 할 때 대다수의 사람은 집 칸이나 있고 밭뙈기나 있고 거느린 바의 생활환경에 있어서 지장을 느끼지 않고 산다는 견지에서 대답을 합니다.
살기는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인간들은 어떻게 사느냐? 살기는 사는데, 생활을 통한 생활은 영위할 줄 압니다, 그러나 사는 데는 그렇게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그보다도 한 단계 높여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 사람이냐? 밥도 먹기는 같이 먹고 사는데 생각 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밥만 먹고 술만 마시고 사는 사람이 있고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151-70, 1962.10.07)
생활에 있어서 패하는 사람은 신앙의 길에 있어서도 패배자가 되기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활환경에 있어서 사탄과 하나님이 나를 놓고 서로 빼앗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183-298, 1988.11.07)
사탄을 하나님과 어디에서 분별하는가? 영계에서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서 하지요? 생활. 자기 한 사람에 있어서 그것은 양심 육심입니다. 가까운 내적인 내용은 하나님편, 육심적인 것은 사탄편입니다. (183-299, 1988.11.07)
손과 손이 마주보게 되면 그 손의 모양은 같습니다. 그러나 한 손은 오른쪽이요, 또 한 손은 왼쪽입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같은 것 같지만 서로 다릅니다. 따라서 오른쪽 왼쪽을 분별해서 어느 것이 앞에 가는 것이고 어느 것이 따라가는 것이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24-215, 1969.08.17)
요즘에 와 보니까 원리는 원리대로 돌아가고 말이예요, 여러분은 여러 분대로 돌아가고, 또 교회는 교회대로 돌아가고 있더라구요. 나 그렇게 느꼈다구요. 원리를 배웠으면 배운 대로 그 원리 위에 내가 서야 할 텐데, 원리 위에 여러분과 교회가 서 있지 않고 전부 따로따로예요, 이건. 이래 가지고는 큰일난다구요, 이러다간.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 있지요? 이러다가는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날 것입니다. (109-308, 1980.11.02)
2) 우리가 가져야 할 생활의식
선생님이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강조한 것이 무엇이냐? 지난날 막연하게 살아온 생활을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18-178, 1967.06.04)
개인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을 확실히 규명해야 하고, 또 가정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도 확실히 규명해야 합니다. (24-29, 1969.06.22)
최후에 남아질 것은 뭐냐? 인간들이 구상했던 철학도 아니요, 그 어떤 인생관도 아닙니다. 하나님 플러스 인간, 신인(神人), 신인(神人) 삶의 길, 신인 생활관입니다. 인생관도 마찬가지로 신인 인생관, 신인 세계관, 그것이 통일된…. 그것이 막연하게 하나님을 대해 가지고 사람이 알 수 있는 정도의 자리가 아니라 사람이 영원히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자리입니다. 왜? 하나님과 사람은 본래 떨어질 수 없는 자리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그 떨어질 수 없었던 자리 이상의 자리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신인(神人)이 하나된 생활적인 무대, 세계적인 무대를 요구 하고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65-122, 1972.11.05)
여러분은 현재 어디에 처해 있습니까? 통일교회를 중심삼아 가지고 어디예요? 통일교회 교인들은 밤이나 낮이나, 언제 어디 가든 선생님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어야 됩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이 머리 가지고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이 가는 방향에 보조를 맞추면서 모든 생명을 다 투입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이제는 삼합(하나님, 선생님, 여러분)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보조를 맞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사의 결정적 내용이 달려 있기에 삼자가 일치되는 점에서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점에 생명의 부활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이 아버지와 선생님이 하나되고 선생님과 여러분이 하나되어 일치될 수 있는 연결점입니다. 거기서 일심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뜻과 일치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31-319, 1970.06.07)
여러분에게는 삼자의 심정이 일치 (아버지의 뜻과 여러분의 뜻과 여러분이 앞으로 복귀할 믿음의 아들딸의 뜻, 때가 일치되고 사람이 일치되고 방향이 일치된 자리) 되는 가운데 하루면 하루의 생활을 어떻게 해 나가느냐, 또 한 달이면 한 달의 생활을 어떻게 해 나가느냐, 일년이면 일년을 어떻게 그런 기준으로 수습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24-133, 1969.07.20)
여러분은 자신을 점검해 봐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동기와 일치되고 목적과 일치되고 주체와 일치되느냐? 내가 동기와 목적이 일치 못 되고 주체 앞에 대상적인 자리에 못 선 나를 발견하였을 때는, 동기와 목적에 일치되고 주체와 일치되어야 한다는 걸 언제나 생각해야 된다구요. 주체 대상 관계 확정, 방향성 확정, 그다음에 목적성이 뚜렷해야 된다 이거예요. 여러분은 그걸 생각하면서 움직였어요, 지금까지? (66-252, 1973.05.15)
하나님이 원하는 생활은 어떤 것이냐? 자기 위주한 생활이 아닙니다. 자기 위주한 생활이 아니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은 방안에다 지구의(地球儀)나 세계 지도를 하나 떡 걸어 놓고 언제나 생각하라 이거예요. '하나님이 오늘 어디로 갈 것이냐? 내가 내 마음을 이렇게 갖고 있는데 천지를 창조한 그 하나님이 나만 바라보고 있을까? 어디로 갈 것인가?' 그걸 생각해야 돼요. (155-248, 1965.10.31)
단조로운 생활이 습관화되어 가지고, 그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속된 생활환경을 개척하고, 그 속된 환경에 보다 고차적인 가치의 내용을 부여하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악한 세상에서 선의 입장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외적인 생활을 지배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4-134, 1970.08.30)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수양이 필요해요. 활동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요. 활동하다가 조용히 앉아 가지고 위 아래를 품고, 좌우를 품고 맞출 수 있는 생활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 놓으면 틀림없이 사랑은 본질적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반드시 종적 축의 자리에 머문다 이겁니다. (185-182, 1989.01.08)
3) 체질화되어야 할 생활방식
① 하나님을 중심한 생활
모든 종교에서는 보는 것을 함부로 보지 말고, 듣는 것을 함부로 듣지 말고, 말하는 것이나 대하는 것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전부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해야지 자기 중심삼고 하면 안 된다 그 말이라구요. (66-226, 1973.05.13)
우리가 말을 하고, 보고, 느끼고, 또 감정적으로 체감하는 일체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연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53-237, 1972.02.29)
하루 24시간의 생활권내에서 내가 보고 듣고 했던 모든 일들은 무엇을 위해 보고 들은 것이냐?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보고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느끼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천상세계의 생활과 연결시켜 생활해야 합니다. (35-283, 1970.10.25)
밥을 먹을 때도 '아버님, 먼저 드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11-216, 1961.08.26)
좋은 음식을 먹거나 좋은 옷을 입을 때는 그냥 먹고 입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 먼저 돌려드려야 됩니다. 길을 걸을 때도 우편에는 아버지를, 좌편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야 됩니다. (24-181, 1969.08.04)
'아이고, 나 배고파. 아이고, 배고파. 밥 밥 밥 !' 이러는데 그거 누구를 위해서 먹겠다는 거예요?「하나님요」 그래요? 하나님을 위해 먹겠다고 그래요, 나를 위해서 먹겠다고 그래요?「하나님요」 그것을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돼서 하나님을 위해 먹느냐? 하나님의 완전한 성전을 내가 만들어야 되겠다 이거예요. 하나님의 성전을 완전히 …. 그래서 '속에 있는 하나님이 밥을 먹자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라는 거예요. '속에 있는 하나님이 밥을 먹자고 한다, 배가 고프니까' 이렇게 생각하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렇게 밥을 먹으면 그밥은 거룩한 밥이라는 거예요. 밥이 밥님이 되는 거예요, 밥님이.
그다음에 변소 갈 때는 어떻게 생각해야 돼요, 변소 갈 때는? 변소 갈 때는 어때요? 나를 위해 가나요, 전체를 위해 가나요? 마찬가지예요, 마찬가지. 이 성전이 지장이 있겠으니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변소 가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라는 거예요.
숨쉬는 것은, 숨쉬는 것은 어때요? 마찬가지라구요. 또 듣는 것은? 나 혼자 듣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거예요. 보는 것도, 만지는 것도, 전부 다…. 나 혼자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라구요. 사람을 대하더라도, 사탄세계를 대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대한다고 생각하라 이거예요. 말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말한다고….
본래 그렇게 완전히 하나된 후에는 나 중심삼고 살고, 나 중심삼고 생각하고, 나 중심삼고 사랑하는 것이 원칙이라구요. 그걸 알아야 돼요. 그걸 확실히 알아야 된다구요. 그때는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사랑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생각이 되고 하나님 중심삼고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원칙이라는 거예요, 원칙. (92-166, 1977.04.03)
주체와 대상 관계의 인연을 틀림없이 알았다 할진대는, 전폭적으로 모든 것이 주체를 위하는 것이 되어야 된다구요. 보는 것도 그렇고, 듣는 것도 그렇고, 또 먹는 것도 그렇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아이 맛있다. 아이 맛있다' 이렇게 먹는 건 자기를 위해서 먹는 것이지만, 주체를 위해서 먹으면 '참 고맙기도 하지' 그러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 나를 데려다 놔 줬기 때문에 오늘 이와 같은 자리에서 밥을 먹는구나' 하게 되면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체를 위해 먹는 것입니다. 잠을 자는 것도 그렇다구요. '아이구, 내가 잘나서 이렇게 이런 자리에서 잠을 자지' 그러는 것이 아니라구요. '아, 하늘이 이끌어 가지고 망하는 운명으로써 끝을 보더라도 한이 없던 내가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은, 그 망할 수 있는 운명을 막기 위해서 하늘이 몇번이라도 수고한 공이 있기 때문이다. 참 감사하지'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를 위한 대상의 자리는 불평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평이 있을 수 있어요? 불평은 망동입니다. 파탄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은 불평을 불허한다구요. 무엇을 불허해요? 불평을 불허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감사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하늘은 언제나 주체로 계시기 때문에 주체와 더불어 상관된 운명을 가지고 그를 이탈하는 생활의 법도, 생활의 형태는 있을 수 없다구요. 그러니까 보고를 하라구요. 어디 혼자 있더라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쓱 가서 앉더라도 앞뒤로 하늘이 와서 같이 앉는 것을 느낀다구요. 그래 가지고 뭘 감상을 하게 된다면 마음으로 그것을 느낀다구요.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경치를 바라보시고 어떻게 느낄 것인가? 서울시를 바라보실 때는 어떻게 느낄 것인가? 그 역사, 그 세계가 그렇다면 거기에 반드시 관계를 맺고 들어온다구요. 이러한 문제 등등을 중심삼아 가지고 언제나 여러분이 하늘이 주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체휼적인 신앙권내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천리라는 것은 순서를 올바로 지키는 데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 하늘은 절대적인 주체다 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 주체를 무시하는 사람은 대상이 못 됩니다. 나는 절대적인 주체 앞에 절대적인 대상이 되려니 절대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가정에 들어가 사랑하는 것까지도 전부 대상과 주체 입장에 서 가지고 하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일체가 그런 것입니다. 그런 가정은 망하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잘 주고 잘 받으면 무엇이 벌어진다구요? 벌어지긴 벌어지는데 잘 주고 잘 받았느냐, 잘못 받았느냐 하는 비례에 따라 가지고 결과가 벌어지는 거라구요. (58-303, 1972.06.25)
② 참부모를 중심한 생활
여러분은 이제 참부모하고 같이 살아야 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참부 모는 할아버지 입장이고, 자기 어머니 아버지 입장이고, 자기들은 장자의 입장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다른 거예요. 3대가 걸쳐 같이 산다는 결론이예요. 하나님이 나와 같이하고, 참부모가 나와 같이하고, 자기 부모가 같이하는 걸 느끼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다, 죽었다 하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시대에 들어왔다구요. (131-97, 1984.04.16)
심정적 인연을 통해서 타락이 된 것이기 때문에 타락의 문을 열어 제치려면 그것보다도 고차적인 심정적 힘을 가지지 않고는 못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리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선생님이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리며 야단하게 되면 선생님이 쓱 나타나서 가르쳐 주는 일이 벌어집니다.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무슨 좋은 옷감이 있으면, 혹은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붙들고 '아, 가슴이 아파서 떠날 수가 없구나. 이걸 우리 선생님께 갖다 드리고 싶다. 내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갖다 드리고 싶구나' 하는 마음이 우러나고, 온 몸이 노그라지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이 불쌍한 것을 느끼면서 눈물이 사무치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벌써 선생님이 그것이 양복이면 그보다 더 좋은 양복을 입고 좋은 넥타이를 매고 '허허' 웃으면서 나타나서 '왜 그러느냐?'고 하는 장면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게 좋은 것이 다 있는데 왜 그러느냐'고 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벌어진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모르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이상한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이라든가 세계 각국 사람들이 선생님이 가기로 약속을 했으면 그리움이 고조되어 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자다 말고 일어나서는 '선생님, 언제 오십니까?' 이러는 거예요. 그렇게 사무친 경지에 들어가면 영안이 열려 버립니다. 그래서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게 되면 선생님이 '아 그러냐'고 해 가지고 에덴동산도 데리고 가서 구경시켜 주고 그런다는 거예요. 그때 그 사람들은 그것이 영적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끼는 거예요. 그 길이 아니고는 그런 세계가 열리지 않아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눈이 뭉그러지고 코가 메이도록 울면서 그리워해야 합니다. 사람이 너무 울면 여기가 막 아픕니다. 그만큼 사무치게 그리워 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고 부르는 데 있어서도 사형장에 끌려가는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다른 먼 나라로 떠나는 아들의 입장에서 애절하게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는 그런 기준 이상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연맺기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였느냐 하는 것이 자신의 재산입니다. (50-283, 1971.11.08)
일체를 부모와 더불어 상관하고, 부모와 더불어 결정하고, 부모와 더불어 의논하고, 부모와 더불어 해결해야…. (44-170, 1971.05.06)
③ 선을 중심한 생활
처음 출발에서부터 중심과 방향을 일치시켜 가는 사람은 나중과 시작을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에, 최후의 승리는 주체의 것인 동시에 처음부터 끝까지 간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여러분은 중심을 가지고 살라, 중심을 가지고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57-270, 1972.06.04)
노래를 듣는 데도 선악이 있습니다. 보고 듣고, 밥을 먹으나, 자나깨나 모든 것에는 선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26-129, 1969.10.19)
자나깨나 먹으나 쉬나 보나 뭘하든 전부 다 뜻을 중심삼고 해야 됩니다. (73-58, 1974.07.29)
현재 입장은 언제든지 선악의 분기점에 서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말도 선한 말을 해야 되고, 이 눈으로 보는 것도 선한 것을 봐야 합니다. 여자들은 한눈을 잘 팔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놈의 눈을 컨트롤해야 돼요. 눈을 제어하고, 손을 제어하고, 오관을 다 제어해야 돼요. 내 가는 걸음걸음이 전부 다 어디로 가야 되느냐? 친구를 만나나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그래도 나를 만났다가 그가 한 발자국 이라도 선한 면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공적인 말을 할 줄 알아야 되겠다구요. 이러한 것을 생활권내에서 조종해 가고, 그러면서 나는 저 세계의 인류를 위해서 사랑의 깃발을 들고 가는 것입니다. 공부도 그래서 하고, 일도 그래서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자연히 돌아가는 거예요. (109-307, 1980.11.02)
④ 하나의 목적에 일치된 생활
개인이 땅 위에 와 가지고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 또 생활을 통해서 목적한 일을 성취시킬 수 있는 하루하루를 남기느냐 못 남기느냐 하는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그 목적을 중심삼고 그 목적에 대한 확실한 관점을 세워서 거기에 적중될 수 있는 방향, 일치될 수 있는 방향을 어떻게 갖추어 나가느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아무리 한 목적을 가지고 출발했다 하더라도 그 방향이 어긋나면 그 목적과는 상관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갖고 나설 때에는 언제나 방향의 일치라는 문제를 우리는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방향 일치라는 것을 중심삼고 볼 때, 그 목적과 나는 직선상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목적과 나와는 언제나 상대적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직선상에서 그 목적과 상대를 갖춘 자리에 서지 않고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오른발을 옮기고 왼발을 옮길 때, 그 목적과 직선으로 일치되는 자리를 취하지 않고는 반드시 엇갈리기 마련입니다. 벌써 한 발짝을 잘못 디디면 엇갈리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바른쪽으로 치우쳐도 안 되고 왼쪽으로 치우쳐도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용을 취해 가지고 그 목적과 그어지는 직선상에서 일치화시킬 수 있는 자기를 발견하는 데서부터 목적의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직선을 무시하고 그 직선과 일치되지 못하는 시간적인 기대 위에 서게 되면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그 길은 이미 탈선이 되어 나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우리가 말을 하든가 혹은 보고 느끼는, 즉 오관을 통해 느끼는 데 있어서도 자기 홀로 느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 홀로 느낀다는 그런 입장에 서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목적과 일치하는 방향을 가진 자리에서 느끼게 될 때, 그 자리는 공동적인 목적을 향하여 공동적인 입장에서 공동적인 방향을 취한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필코 같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엇갈리게 되면 하나님은 같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방향이 잘못되면 수고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협조하게 되면 협조한 만큼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서로 소모가 되는 것입니다. 헛일이 되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서게 될 때는 하나님이 협조할 수 없고 같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난 이후 느끼는 모든 감각이나 동작이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아 가지고 언제나 직선상에 귀일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점을 상실하게 될 때에는 뜻과 나와는 관계맺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57-226, 1972.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