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인생이 가야 할 길
1) 한 치 앞을 못 내다보는 인생살이
생활은 하루하루를 말하고, 생애는 일생을 두고 말하는 거예요. 우리 인간생활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사는 생활이라는 것은 백년권내에, 한세대라는 것이 백년권내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백 살 이상 사는 사람 많지 않아요? 우리 승도 할머니가 몇 살이었던가? 「아흔 네살」 아흔 네 살에 돌아가셨지요? 그거 알아요?「예」 아마 승도 할머니도 백 살 넘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이 인생살이를 모르고 가잖아요? 여러분은 어떻게 가야 되는지 알아요? 사람이 한 치 앞을 못 내다본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입니다. 우리 인생의 생애노정을 알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깜깜한 밤에 알지도 못하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양이 인생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내일을 모르고 가니? 내일이 광명이 아니라 깜깜하다면, 깜깜한 암흑이라면 암흑인 장래의 길을 걸어가는 걸음이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아침이 되어 눈뜨고 다 볼 수 있는 것을 중심삼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걸어가는 그 자체가 어두운 심야에 발을 옮기는 거와 같은 인생살이가 아니냐 이겁니다.
이러니 생애노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답답해요? 그걸 심각하게 생각하면 꽉 막힌 쇠통 속처럼 질식된 환경 가운데에 걸어가는 입장과 마찬가지요, 또 그런 데서 통을 밀고 가는 것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 인간상이 아니냐 이겁니다. 한 고개 넘으면 또 한 고개가 생겨나고, 두 고개 넘다 보면 세 고개가 있고, 세 고개 넘다 보면 네 고개가 생겨나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더 큰 고개가 그다음에 기다리고 있더라 이겁니다. (175-195, 1988.04.17)
출발을 잘못하면 난데없는 곳으로 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가 대해(大海)를 항해하더라도 출발한 항구에서부터 나침반을 중심삼고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하여 방향선을 그려 놓고야 가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출발한 항구가 어디냐? 모르고 있습니다. 나침반을 가지고 피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를 그려 갈 수 있는 방향성이 어디 있느냐? 없다구요. 이게 꼬불꼬불 제멋대로 왔다갔다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제아무리 했댔자 인간으로 끝나는 거예요. (172-28, 1988.01.03)
2)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지금 우리는 알든 모르든 어느 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내가 움직이는 시간에도 가고 있는 것이요, 쉬고 있는 시간에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나뿐이 아니고 이 민족, 혹은 이 세계, 더 나아가 하늘과 땅까지도 어떠한 곳을 향하여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일생을 거친 후에 나는 어떠한 곳으로 갈 것인가? 이것이 인간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종교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철학도 역사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원돼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도 이런 운세에 사로잡혀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가야 할 내 자신이라 할진대, 이 몸은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이 마음은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또 이 생명은 어디를 향하여 기울어지고 있으며 내 심정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내 소원 혹은 소망과 이념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차피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는 날이 몸은 흙에 묻힘으로써 끝날 것입니다. 그러면 몸이 묻히는 그날 이 마음도, 이 생명도, 이 심정도, 이 이념도, 혹은 소원까지도 같이 묻혀 버리고 말 것인가?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인가? 여기에 확실한 내용과 확실한 해결점과 확실한 목적관을 세워 놓지 않는 한, 이는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는 걸음을 붙잡아 놓고, 움직이는 마음과 기울어지는 심정을 막아 놓고 '너는 어디로 가느냐?' 이것을 물어 보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싸워 나오는 사람들이 성현 현철이요, 혹은 수많은 도주(道主)들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게 됩니다. 그들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나왔지만 이날까지 '내 몸은 이러한 곳으로 갔으며 내 마음과 내 심정, 내 생명과 내 이념은 이런 곳을 향하여 달렸노라. 그러니 온 천하에 있는 모든 만민, 혹은 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물은 이곳으로 가라'고 자신있게 명령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8-194, 1959.12.20)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중심삼고 태어났으며, 무엇을 중심삼고 가야 될 것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가야 될 것이냐? 이것은 하나님을 빼놓고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빼놓고는 동기 없는 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동기를 갖지 못한 사람은 어떤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더라도 그결과는 거두어질 수 없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건물을 지을 때는 설계자가 설계한 설계도에 따라 건축을 하게 됩니다. 설계의 원본도 없이 지어진 건축물은 설계자가 목적한 건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1-98, 1968.11.17)
그러면 우리들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이냐? 사선(死線)을 넘어서라도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하나님을 찾아 그 하나님을 모셔 놓고 마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날, 내 마음세계에서 '이 이상의 소원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한때를 맞이해야 됩니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들은 어려움을 참고 억울함을 참고 분함을 참으면서 이 세계를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넘어갈 자신이 못 되어 있는 한, 세계와 더불어 사라질 것입니다. (8-202, 1959.12.20)
자, 이래서 사람은 어디로 가느냐? 하늘나라로. 이렇게 된 거예요. 천사는 어디로 가느냐? 하늘나라로.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로 가느냐? 하늘 나라로. 그뿐만 아니라 기르던 개새끼는 어디로? 지옥이 아니라구요.
옛날에 피난갈 때, 이북에서 피난갈 때 상당히 잘사는 부잣집인데, 상당히 비싼 개라고 뭐 자랑하던 그런 개인데 피난간다 하니까 개를 떡 문에다 매놓고는 '야! 잘 있거라. 나만 갔다 올께' 하는 거예요.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그러면 안 된다구요. 이제는 개도 천국으로. 모든 만물도 천국으로. 주인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78-329, 1975.06.10)
사람은 어디로 가느냐? 영계를 향해 가는 거예요. 영계는 바다와 마찬가지예요. 어차피 가야 되는 겁니다. 거기에는 바다에도 흐름이 있는 것처럼 조화무쌍한 변화가 있다구요. 바다에는 주류의 흐름을 중심삼아 가지고 담수에는 없는 조화의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다에 수많은 어족이 있듯이 거기에는 수많은 새로운 천지가정이 있습니다. 마찬가지예요. 저나라에 가게 되면 마찬가지예요. (141-306, 1986.03.02)
3) 일생은 영계를 위한 준비기간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계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과 영계는 두 세계가 아니고 하나의 세계로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야 할 곳, 우리가 가서 살아야 할 그 곳이 어디냐? 물론 우리는 육신생활을 하면서 이 땅에 있지만 영원한 세계를 향해서 가고 있는 거예요. 일반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게 되면 일생 동안 10대를 지나, 20대를 지나, 30대를 지나 중년을 지나고 장년, 노년시대를 거쳐 간다 이겁니다. 청춘시대를 지나 가지고 장년시대로 들어가게 되면 점점점 한 고개를 넘어서 그다음엔 노년시대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는 해와 같이 일생을 끝마칩니다.
그러나 영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일생이라는 것이 잠깐이고, 죽은 다음에 우리가 맞이해야 할 세계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일생 기간이라는 것은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기 위한 기간이다 이거예요. 세상이 그런 것 같지 않아요?
학생을 예를 들어 말하면, 학생이 한 학기, 혹은 한 학년에 있어서 그 학교가 제정한 모든 학과의 학점을 따야만 하는 학점의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백 점으로 하여 가지고 볼 때, 그 기준에 얼마만큼 도달 하였느냐 하는 비준에 의해서 학교에서 인정받는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점에 미달하는 퍼센티지(PERCENTAGE)가 많으면 많을수록 학교가 세운 그 가치 기준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표준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측정하기 마련이다 이거예요.
우리가 일생 동안 육신세계에서 사는 것은 마치 학교에서 한 학점을 준비하는 기간과 같다 이거예요. 우리 일생을 건 학점을 준비하는, 어떠한 일생이라는 과정에 있어서 아니할래야 아니해서는 안 될 책임부서에 해당하는 실적을 추구하고 있다 이겁니다. 다시 말하면 책임을 추구하는 어떤 기준 앞에 얼마만큼 일치되느냐 하는 그 기준치를 중심삼고 여러분이 매일 생애노정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거예요.
일반 사람들은 그걸 생각지 않는다는 거예요. 태어났으니 그저 부모님 모시고 가정에 산다, 이렇게 났으니 이렇게 산다, 일반 사람들 살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삽니다. 그렇게 사는 모든 생활의 중심이 뭐냐 하면, 육신생활의 일상생활을 중심삼고 필요한 물건, 즉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을 의식주로 잡는다 이거예요. 일반인들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영계가 확실히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다 이겁니다. 왜? 어째서? 어떻게 돼서? 많은 체험을 통해서,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 또는 현실적 사실이 우리 생활 주변에….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만큼 세계적인 기반을 형성할 때까지 그 배후, 전후를 살펴볼 때 많은 체험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통일교회 교인들이다 이거예요. (140-121, 1986.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