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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식구가 되자

1965.12.07 (화) 강원도 춘천교회

자기 집이 필요한 동시에 자기 동네가 필요하고, 자기 동네가 필요한 동시에 면이라든가 군이라든가, 더 나아가서는 자기 집을 지켜 줄 수 있는 한 나라가 필요합니다. 그렇지요? 나라가 필요하면 또 전세계가 필요하고, 전세계가 필요하면 또 역시 더 큰 하늘땅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보다 좋고 귀하고 나은 것을 바라는 인생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이 태어나 가지고 생활을 하며 역사노정을 거쳐 이 시대까지 쭈욱 나왔습니다. 그들은 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한 가정의 부모가 됐고, 남편이라든가 혹은 부인이 돼 가지고 자식을 낳아 하나의 가족을 이루어 살았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혹은 그 무엇을 위하여 산 그 사람들이 지금은 영계에 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땅 위에는 사람들이 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 갔고 지금도 살고 있는 이 현세를 바라보면 행복만이 있는 것이 아니예요. 선만이 있는 것이 아니예요. 또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다 하는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예요.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이, 선한 것보다는 악한 것이, 행복한 것보다는 불행한 것이 많은 이 세상이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누구를 물론하고 이 세계보다도 더 새롭고 이 세계보다도 더 선하고 이 세계보다도 더 가치 있는 세계를 바라고 있는 것이요, 또 바랄 것이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녹음이 잠시 끊김)

어느누구를 물론하고 그 마음속에서는 이것보다도 더 행복스럽고 이것보다도 더 자유스럽고 이것보다도 더 이상적이고 가치 있는 것을 찾아 헤맨다는 것을 볼 때에,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그 국가와 그 사회와 그 가정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 나, 이 자체들은 완전한 것이냐? 어때요? 완전한 것일 것이냐? 완전해요, 완전치 않아요? 「완전치 않습니다」 좀더 좋은 것, 좀더 귀한 것, 좀더 행복스러운 것, 좀더 평화스러운 것을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내 자신이 내 자신을 보장할 수 없고, 내 가정이 나를 영원히 보장할 수 없고, 내 부모가 나를 영원히 보장해 줄 수 없고, 이 국가도 역시 그렇고, 이 세계의 어떤 주의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행복의 주체면 주체, 영원하신 이념의 주체면 주체, 혹은 절대적인 선의 주체면 주체가 나를 내 개인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사회·국가·세계 어디를 가든지 보장해 줄 수 있는 그런 한 분이 계셨으면, 그런 주인공이 계셨으면, 또 그런 곳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오늘날 수많은 인간들이 막연하게나마 바라는 소망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자체들이 살고 있는 우리 집…. 여러분 우리 집이 있어요. 우리 가정, 그러면 과연 우리 집이 진정한 우리 집이냐? 고향 땅에 가면 여러분을 낳아 준 어머니 아버지가 있습니다. 내가 추울 때 입을 것을 주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고, 내가 무식할 때 배움의 길을 닦아 주신 그런 부모가 있어요. 또 내 주위환경에는 모든 것을 거들어 주는 형제가 있어요. 그런 형제를 갖고 있는 그런 가정에서 아들로 태어나고 딸로 태어났는데, 그 집이 과연 행복한 집이냐?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것보다도 좀더 완전하고, 이것보다도 좀더 귀한 것, 영원히 나로 하여금 내 사랑하는 부모를 붙들고 그야말로 행복을 노래할 수 있고, 형제 품에 안기어 가지고 영원무궁토록 이것이 내 복지라고 찬양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를 갖지 못한 것을 볼 때에 오늘 만민은 불행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가정의 환경을 박차고 나서는 청소년들이 많은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는 자기 자식들을 대하여 효자 효녀가 되기를 바라고, 나라는 그 국민을 대하여 충신 열녀가 되기를 바라지만 효자 효녀의 길을 못 가고 있어요. 원칙으로는 가야 되겠지만 가지 못합니다. 충신 열녀의 길을 가야 할 것이 인생이 갈 길이지만 가지 못하는 것은 왜 그러냐? 우리 본래의 마음과 우리가 생활하는 이 사회환경이 배치되기 때문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한 면에서는 새로운 우리 집, 새로운 우리 나라, 새로운 세계, 새로운 그 무엇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로 달려 나가려는 마음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거예요.

오늘날 여러분 하나의 자신을 두고 볼 때, 가정이면 가정을 두고 볼 때, 한 쪽으로는 원치 않지만 한 쪽으로는 더 좋은 것을 바라면서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타락한 세계를 본연의 세계로 옮기려는 하나님의 복귀섭리

그러면 오늘날 현실에서 살고 있는 내 가정이면 가정 그 자체를 두고 볼 때, 이것이 완전치 못하고 불완전합니다. 이 불완전한 상태에 영원히 있으면 불완전으로 출발하여 불완전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어느누구나를 물론하고 양심은 선을 지향하고 본성은 천륜과 더불어 인연맺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천륜의 도를 따라가고자 하는 양심의 바탕은 언제나 고정된 악, 혹은 좋지 않고 원치 않는 환경을 벗어나서 더 좋은 것을 원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천리를 대하고 있는 본심이 있는 연고인 것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의 이 세상을 종교적 명사를 빌어 말한다면 타락한 세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가정에서부터 우리 가정이 나와야 되겠고…. (판서하심) 이런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바라고 나가지만 어떻게 해야 이런 가정이 될 것이냐? 우리 집, 우리의 형제, 우리의 참다운 부모…. 우리 부모가 영원히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천하 어디를 가든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요, 우리 형제가 사랑하는 그 사랑은 천하 어디 가든지 환영받을 수 있는 사랑이다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본연의 가정을 갖지 못하고, 본연의 부모를 갖지 못하고, 본연의 형제를 갖지 못하고 있으니 그 부모와 형제 가운데서 태어나 살고 있는 내 자신도 역시 본연의 내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의 자아를 부정하고 본연의 자아에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 기로에서 뒤넘이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인류가 타락한 그날부터 수많은 역사노정이 지나갔지만서도 아직까지 역사 도상에 있어서 본연의 우리 집, 본연의 우리 부모, 본연의 우리의 형제, 본연의 우리의 가정이 이 지구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뜻은 무엇이냐? 지금까지 수고한 것이 무엇을 위해서냐? 본연의 우리 집, 본연의 우리 가정을 찾아 가지고 본연의 부모, 본연의 부모를 중심삼은 본연의 형제, 본연의 식구를 기준한 본연의 가정에서부터 출발하여 본연의 국가, 본연의 세계까지 완결짓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런 가정말고 인간세계에서 바라보고 있는 소망의 가정은 하나님도 원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소망의 가정을 찾아 내려오고 우리 인간은 소망의 가정을 찾아 올라간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 가정을 인간세상에 되돌려 주려고 하는 것이요, 인간은 본연의 가정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찾아가고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이 본연의 가정을 소개해 주기 위해서 온다는 거예요. 알겠지요?

그러면 이 본연의 가정이 대번에 나올 수 있느냐? 대번에 나올 수 없습니다. 이 과정에는 참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참부모, 참형제가 있어야 쭈욱 내려와서 여기서부터 국가 형성…. (판서하시면서 말씀하심) 이것이 나오기 위해서 오늘날 타락한 이 땅 위에서는 어떤 단계를 거쳐 나오느냐? 본연의 아들딸이 나오기 전에 본연의 종이 나와야 되고, 본연의 양자가 나와야 됩니다. 그다음에 본연의 아들딸이 나오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제아무리 충성을 하고 제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종도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종 됐어요, 지금까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 가지고 어떻게 종이 돼요? 하나님의 종이 되려야 종도 될 수 없는 과거의 우리였다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오늘날 하나님 앞에 있어서 종의 자리를 거쳐 가지고 그다음에 양자의 자리를 거쳐 그다음에 직계 자녀, 그다음에 부모가 되는 거예요. 이게 나와 가지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나오는 거예요. 이걸 왈 복귀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귀역사.

오늘날 이 수많은 인류를 놓고 하나님께서 6천 년 동안 수고해 오셨습니다. 6천 년 동안 수고해 오셨는데 말세라고 하는 이때, 끝날은 어떤 때냐? 이 세계상에는 본연의 종으로 살 수 있는 무리들이 있고, 본연의 양자와 같은 무리가 있고, 본연의 자녀와 같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 자녀와 같은 무리가 태어난 기반 위에 본연의 부모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사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신랑이요, 너희들은 신부라’ 하신 것입니다. 지상에 하나의 아버지와 하나의 어머니가 나타나야 된다는 거예요.

어린양 잔치라는 것은 무엇이냐? 이 지구상에 인류가 잃어버렸던 본연의 우리 집을 비로소 건설하는 그 순간입니다. 우리 집을 건설하려면 거기에는 무엇이 있어야 되느냐? 부모가 있어야 되고 형제가 있어야 되고 종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걸 기반으로 하여 자녀가 번식됨으로 말미암아 본연의 종족이 벌어지고, 본연의 민족이 벌어지고, 본연의 국가가 벌어지고, 본연의 세계가 벌어져서 비로소 지금까지의 악한 세계를 전부 다 청산해 버리고 이 선의 세계를 향하여서 섭리해 나오는 것이 오늘날 복귀섭리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압니다. 이거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예」

하나님을 중심삼은 한 식구의 인연을 맺어야 할 통일교인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흔히 서로를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뭐예요, 이게? 「식구」 (판서하심) 식구라고 말한다구요. 오늘날 이 땅 위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역사도상에 있어서 이 식구라는 내용은, 이 식구라는 말은 가정을 떠나서는 성립 안 되는 거예요. 그렇지요? 「예」 식구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정이 있어야 되고, 가정이 있기 위해서는 형제가 있어야 되고, 형제가 있기 위해서는 부모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요? 「예」 그런데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교인, 신자라는 명사는 썼지만 식구라는 명사는 쓰지 못했다는 거예요.

오늘날 외적으로 볼 때, 이 세계는 대가족주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대가족주의를 부르짖으려면 대가족의 아버지 될 수 있고 어머니 될 수 있는 부모가 있어야 돼요. 그 부모로 오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아시겠어요? 이젠 알겠지요? 「예」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이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이 식구의 입장을 두고 볼 때, 식구 가운데는 참식구가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그 반대되는 식구가 있어요. 그럴 거 아니예요? 그다음엔 중간패도 있을 거예요.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 여러분들이 하늘이 세워 놓은 하나의 천적인 가정을 중심삼은 그런 식구라는 명사를 부르짖게 될 때 참식구는 어떤 사람이냐? 이게 문제입니다. 이제부터 얘기하려는 것도 참식구가 되자는 것입니다. 참식구! 아시겠어요? 참된 식구, 혹은 참된 형제들이 되자는 거예요.

먼저 식구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를 가져야 됩니다. 형제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가 있어야 돼요. 열 형제가 있어도 부모는 다르지 않습니다. 형제는 다르되 부모는 하나예요. 원칙이 그래요. 부모는 하나요, 형제는 여럿이라는 거예요. 주인은 하나요, 식구는 여럿이라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러면 이 식구의 중심될 수 있는 부모와 주인은 누구를 중심삼은 주인이요, 누구를 중심삼은 부모냐? 나를 중심삼은 부모가 아니요, 나를 중심삼은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중심삼은 부모요, 식구를 중심삼은 주인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주인은 오늘날 이 악한 세계에서 악과 더불어 접할 수 있는 주인이요, 악과 더불어 접하여 있는 부모일 것이냐? 악과 상관 없는 주인이요, 악과 관계 없는 부모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선만으로서 계시는 주인이요 부모라 할진대, 그 주인과 부모는 여러분 개인 혹은 한국 백성을 위주한 부모요 주인일 것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온 세계 30억 인류를 위주로 한 부모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30억 인류, 하나의 대가족을 위주로 한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선 중심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중심에는 누가 서야 되느냐?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 서야 됩니다. 그다음엔 누가 서야 되느냐? 오늘날 이 땅이 악한 세상이 되었으니 이 악한 세상을 전 세계적으로 수습하여 하나님 앞에 끌고 가는 대표자, 구세주가 서야 됩니다. 구세주가 서 가지고, 하나님과 일치가 되어 가지고 하나의 부모의 입장으로서 이 지상에 서야만 비로소 참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고, 그 부모를 참되이 모신 자라야만 참다운 자녀가 될 수 있고 참다운 형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참된 형제와 식구의 참된 주인이나 부모를 참되이 모셔 가지고 하늘의 축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축복은 무엇이냐 하면 하늘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는 땅 위의 구세주의 모든 책임을 위임받아야 할 입장에 서야 하는 연고로 하늘의 역사적인 비밀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금까지 개인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국가로부터 세계까지 벌어진 이 모든 악한 세계를 이끌어 가지고 구원섭리해 나오는 데 있어서 종의 시대를 거치고 양자의 시대를 거치고 직계 자녀의 인연을 거쳐 가지고 참된 부모의 자리를 잡을 때까지 6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났으니 그 6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인연을 참다운 식구와 참다운 자녀들은 심정적인 기준에 있어서 같이 체험했다는 조건이라도 세워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지도해 나오고 오늘 현세의 복잡한 사정을 수습하여 하늘의 대가족 이념을 세우기 위한 것이 하늘과 메시아의 사명이라 할진대 하늘이 이 세상을 품어 현세에 당하고 있는 고통을 우리들이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역사적인 하나님 앞에, 현세적인 하나님 앞에, 혹은 역사적인 주님 앞에, 현세적인 주님 앞에 참다운 자녀의 자리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거예요.

또,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망과 앞으로 올 메시아의 소망을 알아 가지고 현세를 처리하여 앞으로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책임을 해야 합니다. 그 책임까지 겸하여서 하늘 부모, 혹은 하늘 주님과 더불어 동역동사할 수 있는 자기 자체가 되지 않고는 완전하고 새로운 이상세계, 새로운 이념적인 가정, 새로운 이념적인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자리까지 갈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중심삼은 한 식구를 이루기 위해 참부모로 오신 예수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여기에 모인 것은 무엇 때문이냐? 내가 대신 역사적인 하나님을 체휼하고 시대적인 하나님을 체휼하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모든 내용을 체휼하여 과거를 이끌어 세우고 현실을 수습하고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내 자신이 되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또, 그뿐만이 아니라 과거에 왔다 갔던 저 예수님의 모든 것을 재차 수습하고, 예수와 성신이 영계에 가서 현세에 섭리하시는 그 모든 것을 상속받고, 앞으로 이 땅 위에 올 메시아의 터전을 대신 닦기 위하여 수고하여야만, 여러분들은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섭리하신 하나님 아버지,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섭리하신 천지의 주인이요 미래까지 섭리할 구세주 앞에, 여러분들이 자녀가 될 수 있고 식구가 될 수 있고 형제가 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 가지고 역사는 역사대로 시대는 시대대로 갈라놓고 나쁜 역사는 심판해 버리고 나쁜 현세도 심판해 버리고, 과거의 좋은 것은 끌어다가 현세에 세우고 현세의 좋은 것은 역사적인 교훈과 결부시켜 가지고 내 것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주체가 되지 않고는 미래로 출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 위에 누구로 왔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왔고, 하늘의 참된 형님의 사명을 하기 위해 왔고, 하늘의 참된 식구의 사명을 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가 이 땅 위에 와서 한 것이 무엇이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슬픔과 역사적인 하나님의 수고와 뜻 앞에 있어서 하늘을 대신하여 남겨질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수습해 놓고 그 시대 시대에 하늘이 원치 않았던 모든 조건은 제거하고 하늘이 원하는 것만 남겨 가지고 이 둘을 합하여 새로운 천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참다운 자녀가 되고 참다운 형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누구를 위주로 한 참다운 자녀냐 하면 하나님을 위주로 한 참다운 자녀요, 누구를 위주로 한 참다운 형제냐 하면 예수님을 위주로 한 형제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슬퍼하면 나도 슬픈 자리에 나가야 되겠고,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나가면 나도 기뻐하는 자리에 나가야 되겠고, 예수님이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는 자리에 나가야 되겠고, 예수님이 슬퍼하면 나도 슬퍼할 수 있는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한 개인적인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가정을 지나 국가를 지나 온세계를 통하여 그와 같은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역사적인 하나님, 역사적인 구세주 앞에 혹은 역사적인 참부모 앞에 내가 자녀로 설 수 없고 형제의 인연으로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이와 같이 참다운 하나님 앞에는 자녀요, 하나의 주님 앞에는 형제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그 생활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옛날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참다운 효자가 되어 예수님을 위주로 한 참다운 형제를 모집하기 위한 것이 구원섭리인 것을 알았기에 예수를 위주한 생활 전체를 내가 대신 상속받아 가지고 실천해 나가지 않고는 참다운 식구가 될 수 없고, 참다운 식구가 되지 않고는 참다운 형제가 될 수 없고, 참다운 형제가 되지 않고는 참다운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왔다 갔던 예수는 역사적인 조상으로 왔다가 사라져 버린, 지나가 버린 주님이 아니라 그 뜻을 오늘 현세의 우리들에게 상속해 놓으셨습니다. 그 상속받은 뜻을 오늘날 우리들이 재현해 가지고 예수가 하나님 앞에 참다운 아들딸의 입장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상속해 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만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비로소 참부모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믿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은 이 지상에서 무엇을 해야 되느냐? 예수님의 대신 사명을 오늘날 이 평면적인 세계 전 30억 인류 가운데 이루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루어 놓지 못한다면 재림의 뜻은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못 이룬 식구의 인연을 맺어야 할 통일교인

통일교회에서 지금 말하고 있는 식구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예수님의 뜻을 상속받은 하늘 앞에 참다운 아들딸의 입장에서 부르는 식구요, 형제요, 하나의 가족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 식구 식구끼리, 형제 형제끼리는 어떻게 나가야 되느냐? 예수님은 태어나는 그 시간서부터 자라나는 생활 가운데 있어서…. 예수님은 물론 동생도 있었습니다. 동생도 있었고 부모도 있었지만 부모와 형제를 대해서 예수님은 진정 하늘이 원하는 부모요, 하늘이 원하는 형제로서 생각했느냐 하면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념적인 부모를 생각하였고 이념적인 형제를 생각하였지만 그 당시에 있어서 예수 자신을 중심삼고 볼 때, 과연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동생,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부모가 됐느냐 하면 못 됐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진정 하늘이 사랑할 수 있는, 예수님을 참다운 아들로서 키워 줄 수 있는 지상의 부모가 되었느냐 하면 못 됐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늘 앞에 참다운 아들의 입장에 있었지만서도 예수 앞에 나타난 요셉과 마리아는 참다운 부모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은 이 부모의 입장을 대신하여 다시 재림이라는 이념적인 기준을 제시해 놓고 2천 년의 기나긴 역사노정을 미래에 남겨 놓고 섭리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 당시에 아들의 사명을 완결짓고,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의 뜻을 받들었다면 참다운 아들로서의 기반을 완전히 닦는 동시에 참다운 형제의 기반을 닦을 수 있고, 참다운 식구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부모들이 책임 못한 그 자리에까지, 예수 자신이 하늘의 공인을 받아 가지고 부모의 자리에까지 이것을 연결시켜 나갔더라면 재림이라는 명사가 필요 없을 것인데 예수님이 부모의 자리를 완결짓고 가지 못하였던 연고로 재림이라는 명사를 세워 ‘나는 신랑이요, 너희들은 신부라’는 말을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남겨 놓고 갔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예수님이 영과 육을 합하여서 참다운 효자의 도리를, 참다운 효녀의 도리를, 참다운 형제의 도리를, 참다운 식구의 도리를 세워 놨느냐 하면 세워 놓지 못했다 이겁니다.

죽고 감으로 말미암아, 육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의 참다운 효자의 도리를 닦아 놓고, 참다운 효녀의 길을 개척해 놓고, 참다운 형제 참다운 식구의 도리를 개척했지만서도 영육을 합한 참다운 식구의 도리, 참다운 형제의 도리는 개척해 놓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이 도리를 지금까지 2천 년 연장시켜 섭리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 위에 오시는 주님은 어떤 사명을 해야 되느냐? 먼저 영육을 합하여서 참다운 형제의 도리를 세워야 되고 참다운 식구의 도리를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당시에 예수님이, 하늘이 인정할 수 있는 참다운 동생을 사랑하고 싶었지만 사랑하지 못했던 그런 동생, 즉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동생이 이 지구 혹은 이 땅 위의 종말 세계에 있어서 이 땅 위의 신도들 가운데 태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또 예수님이 사랑하지 못했던 누나, 혹은 사랑하지 못했던 식구로서의 그러한 존재들이 오늘 끝날에 있어서 갖추어지지 않고는 오시는 주님이 부모의 인연을 완결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전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참다운 식구와 참다운 형제의 기반을 마련하여 옛날 예수님이 살던 당시의 동생이 되고, 혹은 누나가 되고, 혹은 형님이 되고, 혹은 아저씨가 되고, 혹은 친척이 되어서 하나의 대가족, 하나의 족속을 위주로 한 하나의 대가족권을 이루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예수 앞에 참다운 식구가 되어 있지 못하고 참다운 형제가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이 땅 위에 오신 주님은 무얼 해야 되느냐? 먼저 참다운 식구를 찾아 헤매야 되고, 참다운 형제를 찾아 헤매야 합니다. 그래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오시는 주님은 참다운 식구를 찾으려 해도 식구가 없으니, 참다운 식구가 이 땅 위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연고로 예수의 동생의 사명과 예수의 형님의 사명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살아생전 동생에 대한 한과 형님을 모셔 보지 못한 한과 누이동생을 가져 보지 못한 한과 참다운 식구를 가져 보지 못한 한을 품고 갔기 때문에, 오시는 주님은 그런 전반적인 내용의 요건들을 이 지상에 먼저 만들어 놓지 않고는 참다운 부모의 자리에 나갈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참다운 형제적인 인연 가운데서 과연 우리가 하나이니 하나의 부모를 모시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이런 단결된 하나의 가족 형태를 갖추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갖추어지지 못한 연고로 오시는 주님은 이 가족 기반을 재차 닦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2천 년 동안 준비한 기독교가 그 기반을 못 닦은 연고로 오시는 주님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것을 다시 개인적으로 닦아야 할 입장에 서 있으니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6천 년 동안 종으로서, 양자로서 양자의 과정을 거쳐 직계 자녀, 종의 시대와 양자의 시대와 직계 자녀의 시대, 이런 역사적인 모든 것, 6천년 동안 복귀하여 탕감해 온 모든 종적 역사를 오늘날 이 시대에 있어서 재차 탕감해야 합니다. 종의 복귀역사, 양자의 복귀역사, 직계 아들의 복귀역사의 전체적인 모든 내용의 요건들을 지상에 와서 일대에 완전히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그런 참다운 식구, 참다운 형제, 참다운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되는 과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참다운 식구요, 참다운 형제요, 참다운 가정으로서 기독교를 중심삼고 예수를 참다운 형님 오빠로 모시고 그들은 예수의 참다운 동생이 되고 혹은 예수의 참다운 누이동생이 되어, 하나의 하나님을 위주로 한 하나의 형제와 식구와 같은 입장의 기독교가 돼 있으면 문제는 어렵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하게 될 때는 이러한 모든 전체의 역사를 새로이 해야 합니다. 새로이 하는 데는 대번에 하늘의 아들딸이요, 하늘의 형제요, 하늘의 식구의 자리에 세울 수 없는 연고로 사탄세계에 있는 사탄의 아들딸들을 빼앗아 가지고 종으로서 훈련을 시키고, 양자로서 훈련을 시키고, 직계의 자녀로서 훈련시켜서 다시 세우지 않으면 안 될 이런 엄청난 사명이 오시는 주님 앞에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책임 못 하게 될 때는 무한한 슬픈 역사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는 무얼하기 위해서 모였느냐?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 모였느냐? 기독교를 위주로 하여 참다운 형제 참다운 식구가 되었으면, 그것을 위주로 하여 오시는 주님은 하늘 앞에 참다운 부모를 중심하여 하나의 대가족을 편성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오시는 주님을 받지 않으면 이와 같은 길을 다시 가야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길을 재차 엮어 가지고 기독교가 받지 않아도 오시는 주님 앞에 참다운 종이 되고, 참다운 양자가 되고, 참다운 직계 자녀가 되어서 본연의 대가족을 다시 상속받고 세우자는 이런 목적권 내에서 나아가는 것이 현재의 통일교회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고생 가운데서 종의 입장에서 시련받아야 할 사람도 있는 것이요, 양자의 입장에서 시련받아야 할 사람도 있는 것이요, 직계 자녀의 입장에서 시련받아야 할 사람도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역사노정을 거쳐서….

종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가려면 하늘땅의 한을 풀어야

그러면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선생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과거를 살펴보면 종의 시대…. 하늘 앞에 무조건 종이예요. 변명이 필요 없어요. 죽으라 하면 ‘예’ 해야 하는 거예요. 하늘을 대해서 아버지라는 명사를 쓸 수 없었다는 거예요. 아버지라 부르려면 양자여야 되지요. 하늘 앞에 종이니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일은 맡기는 거예요. 종의 시대에 있어서 싸워 영계와 육계를 정복하여서 종 중에서 참다운 하늘의 공인을 받아 가지고, 비로소 충신의 칭호를 받아야만 양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충신의 칭호를 받아야 양자가 되는 거예요. 군왕에게 있어서 충신과 자기 아들은 다른 거예요. ‘너는 충신이 될 수 있고 열녀가 될 수 있다’라는 칭호를 받아야 양자의 자리에 나가는 거예요.

양자의 자리에 나가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생각이 같고…. 양자의 자리에서부터 자기가 상속받기 위해서는 그 주인, 혹은 그 양부모의 심정을…. 양부모의 혈족을 중심삼고 볼 때 양부모의 인연권 내에 무엇이 인연되어야 돼요. 뭐 같은 것이 있어야 된단 말이예요. 그러려면 심정이 통하든가, 생활의 감정이 통하든가 해야 합니다. 모든 면에서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하고 상하관계로도 통해야 돼요. 아버지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횡적인 활동 조건도 통해야 된다는 거예요. 종의 관계에 있어서 그렇게 통해야만 비로소 양자의 자리에 나간다는 거예요.

양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신 책임질 수 있어야 됩니다. 종의 자리에서는 대신 책임이 아니예요. 심부름이예요. 어디까지나 심부름이나 하는 것이지만 양자의 자리에 나가서는 대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믿고 너에게 명령하노니 내 모든 위업을 대신 맡아서 관리해라 이거예요.

그렇지만 양자는 부모가 살아 있는 자리에서 자기 당대에 이것을 옮겨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자는 내적 혹은 외적 대행을 하며 하늘땅의 어디를 가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는 이런 자리에 나가 가지고 승리의 결정권을 가져야만 비로소 그 기반 위에서 부모의 자리로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반을 닦지 않고는 재림역사가 벌어질 수 없습니다. 재림역사가 이 지상에 벌어지지 않는 한 우리가 찾고 있는 참다운 식구는 나오지 않는 것이요, 참다운 형제와 참다운 가정은 나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이러한 역사적 탕감조건을 기반으로 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냐? 접붙이는 거예요. 재차 접붙여야 돼요.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과 피와 땀으로써 하늘과 일체를 이루자, 눈물과 피와 땀을 흘려 탕감해 가지고 하늘과 일체가 되자’라는 것입니다.

일체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느냐? 종의 노정에서부터 양자의 노정을 거쳐 직계의 아들로 축복받을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야 됩니다. 축복받을 수 있는 자리에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축복받을 수 있는 자리에까지 나가면 그 부모가 거느린 모든 재산은 내 것이예요. 하늘이 우리의 참다운 부모라면 하늘땅의 모든 것은 내 것이예요. 이것을 이용해 가지고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면 절대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전체가, 그 형제가 잘살고 그 가정이 잘살고 그 부모가 즐거워할 수 있는 입장의 행동을 해야지 자기 위주로 한 입장에서 행동하면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가 무슨 자리냐?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던 거와 같은 자리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몸은 비록 개인이로되 개인된 그 몸을 중심삼아 가지고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하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행복보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안식을 위하여, 이 땅 위의 만민의 행복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갖은 고역과 역경의 십자가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런 길을 가더라도 불평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예수는 내가 이런 길을 가는 것은 탕감노정을 거쳐가기 위한 것이요,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러한 것이요, 내가 땀을 흘리고 죽음의 길을 가는 것도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예수의 소원은 이 희생과 맞바꾸어서 역사도상에 남아졌던, 역사도상에 맺혀 있던 하늘의 한과 인류의 한을 푸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이것 때문에 살았고, 이걸 붙들고 싸웠어요. 그래서 하늘땅의 한을, 인류의 한을 풀어 놓았기 때문에 하늘은 인류를 찾아올 수 있고 인류는 예수로 말미암아 하늘을 찾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축복받을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하늘의 한과 인류의 한을 여러분 중심삼아 가지고….

예수님의 입장에 서서 예수님이 못 다 이룬 사랑을 실천해야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와 가지고 진정 인류를 사랑하는 동생으로 품고 싶었고, 진정 자기를 사랑하는 부모의 품을 그리워했지만 그런 부모를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와 같은 입장을 여러분들이 대신하여 우리 통일교회 식구 식구 형제 형제끼리는 나이 어린 식구가 있으면 그는 옛날 예수님이 소망으로 바라던 그 식구와 같이 동생과 같이, 그리고 누나와 같이 아저씨와 같이 예수를 위주로 한 그런 가정의 전반적인 친척 관념을 가져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나갔느냐? 자기는 굶더라도 형제를 먹여 주었고 자기는 어려운 생활을 하더라도 동족을 살려줬고 자기는 죽더라도 그 전체 친척을 살려주기 위한 입장에서 살았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도 역시 그런 입장에서 나가야만 식구와 형제와 아들딸의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지방교회나 혹은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을 왕왕 보게 되면 전부 다 어떤 경향이 벌어지느냐? 개인주의화하기 쉬운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구요. 여러분이 진정 예수님이 그 당시에 동생을 사랑하고 싶었던 그 마음을 대신하여 하늘이 기뻐할 수 있는 입장에 서 가지고 사람들을 사랑했느냐?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가 형님과 같이 모셔 가지고 사랑하고 싶었고 혹은 아저씨와 같이 모셔 가지고 사랑하고 싶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사랑해야 됩니다. 예수가 부모를 모시고 부모 앞에 효도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부모를 모시고 효도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를 위주로 하여서 형님, 혹은 누나, 누이동생, 아저씨, 부모, 자기 친척, 너나할 것 없이 자기 민족, 자기 국가와 같은 이런 내용을, 예수가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던 그런 내용을…. 오늘날 여러분들이 현세에서 그와 같은 입장에 서서, 예수의 대신 입장으로서, 예수가 동생을 사랑하던 마음을 가져야 되고 형 혹은 누나 친척을 사랑하던 마음을 가져야 되고, 예수의 민족·국가·세계관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랑할 줄 아는, 살 줄 아는 통일교회 식구들이 되어야만 비로소 하늘이 찾아 나오는 참된 식구요, 참된 형제요, 참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나가 전도하게 될 때에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한때에는 의심합니다. 저 사람이 참되이 뜻을 위해 가겠느냐, 안 가겠느냐를 생각하는 그런 시대가 있는 거예요.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맺어져 있느냐? 그다음에 그가 따라 나오면 내 대신 책임을 맡길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그다음엔 내가 희생하더라도 그를 살려 줘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느냐? 그 자리까지 나가야만 비로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의 입장에 올라갑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와 가지고 만민을 대신하여 죽어 갔는데 어떤 입장에서 죽어갔느냐? 충신의 입장에서, 양자의 입장에서, 직계의 아들딸의 입장에서 죽어갔고, 모든 시대권내 전체 분야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나오는 신도들 가운데는 종 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양자 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혹은 직계의 아들딸 될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거예요.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교회 믿고 나가는 과정에 있는 한 사람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직계의 아들딸의 시대를 거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생명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전도한 사람, 여러분을 따라 나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더라도, 내 모든 복을 저 앞에 넘겨 주더라도 감사하겠다고 할 수 있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자동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 비로소 축복받을 수 있는 아들딸의 입장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식구들을 가만 보게 될 때 과연 그런 자리에 올라온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이것이 의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진정 우리가 식구라는 명사를 부르짖고 있는 식구로서 완전한 식구가 돼 있느냐? 혹은 하나님의 뜻 앞에 부합된 형제의 명사를 갖추었느냐? 하나의 가정이면 가정, 식구면 식구로서 완전히 돼 있느냐? 돼 있지 않은 경향이 많다는 거예요. 종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혹은 선생님에 대해서는 관계가 돼 있을는지 모르지만 횡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식구라는 명사 가운데에는 형제의 인연이요, 수많은 무리가 동거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횡적인 관계는 아직까지 완전히 돼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들을 세워서 나는 예수님이 당시에 살지 못했던 그 생활무대를 재차 전개해 놓고 형제와 같이 사랑할 수 있고 부모와 같이 모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만민 복귀과정에 있어서 형님이요 혹은 누나 오빠의 입장에서 나온 거와 마찬가지의 입장에 여러분들이 섬으로 말미암아 아들딸의 자리에 설 수 있지 그러지 못하면 자녀의 자리에 나갈 수 없다는 거예요.

역사적인 수고의 노정을 탕감해 나가는 3년노정과 7년노정

그러면 이러한 경지에서 여러분들이 각자를 비판해 보게 될 때 나는 어떤 입장에 있느냐? 이것을 빨리 깨달아 가지고 여러분이 우리 식구끼리는 물론이로되 삼천만 민중 혹은 전세계 인류를 대신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내가 과연 이색 민족을 형제와 같이, 즉 동생과 같이 사랑할 수 있고 언니 형님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돼 있느냐? 이런 관점에서 참다운 부모를 모시고 충성을 할 수 있는 내가 돼 있느냐? 또 만민의 살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던 거와 같이 내가 과연 희생할 수 있겠느냐?

이러한 문제를 걸어 놓고 서슴지 않고 하늘을 위하여 부모를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식구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내가 고스란히 제물되겠다는 결의를 갖추고 나서야만 비로소 하늘이 공인할 수 있는 아들이요, 딸이요, 형제요, 식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짊어진 십자가는 그 당시에 있어서, 혹은 33년 동안의 십자가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2천 년 동안의 십자가로서 연속되는 거예요. 참다운 예수로 출발하여서 참다운 형, 참다운 주인의 입장에서 이걸 연결지어 가지고 지금까지 끌고 나온다는 거예요. 그걸 바라보게 될 때 예수님이 짊어진 십자가는 그 당대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연을 끌고 개인 가정·국가 세계까지, 지금까지 넘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이 짊어진 십자가,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 통일교회에만 한정된 책임이냐? 아니라는 거예요. 전 30억 인류에게 연결된 것입니다. 이 30억 인류가 하늘 앞에 참다운 형제, 참다운 자녀, 참다운 식구가 되어 가지고 참되이 하나님을 위주로 한 가정이 되기 전까지는, 이것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오늘날 각자의 사명이 십 년, 혹은 백 년, 천 년이 가더라도 연대적인 십자가의 책임으로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그런 십자가의 책임을 오늘날 우리들은 연장시켜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을 우리 당대에 축소시켜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힘을 다하여 이것을 단축시키면 단축시킬수록 역사적인 십자가를 제거시킬 수 있고, 우리가 희생하면 희생할수록 민족적인 십자가를 제거시킬 수 있고, 인류적인 십자가를 제거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축시키지 못하게 될 때에는 역사적인 십자가요, 현실적인 십자가요, 미래적인 십자가로 남아진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지방에 나가 전도하게 될 때, 여러분 개체로 나가 전도하되 개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 전체를 대신해 나가 싸우는 것이요, 전인류의 가정을 위하여 나가 싸우는 것이요, 전 우리 형제 식구를 위해 나가 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가 실수하게 되면 여러분을 위주로 한, 하늘이 져야 할 십자가는 여러분이 구원될 때까지, 여러분 개인과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종족과 여러분의 민족과 여러분의 전체가, 여러분 개체를 위주하여 관계된 전체가 고생하게 될 때까지 남아진다는 거예요.

개인을 위주로 하여 전체와 연결지어 나오는 하늘이기 때문에 여러분 개인이 전체적인 책임을 그 당시에 완결짓지 못하면 역사적인 십자가의 고충으로 남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가 그 당시에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전부 다 완결짓지 못하고 갔기 때문에 예수는 2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세워 놓고 그 당대에 짊어져야 했던 십자가의 짐을 개인적인 십자가로서, 가정적인 십자가로서, 민족적인 십자가로서, 국가적인 십자가로서, 세계적인 십자가로서 짊어지고 지금까지 끌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 십자가의 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오시는 주님 앞에 상속해 주어 그 주님이 이 땅 위에 와 가지고 개인적인 십자가로부터 가정적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 십자가까지, 이 지구상에서 영육을 합하여 완결짓지 않는 한 예수님의 십자가도 끝나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십자가도 끝나지 않는 것이요, 우리 식구의 십자가도 끝나지 않는 것이요, 온 인류의 십자가도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연대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연고로 부모가 짊어진 십자가는 여러분의 십자가요, 형님이 짊어진 십자가는 동생의 십자가요, 동생이 짊어진 십자가는 형님과 부모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서로 단합하여 공동적인 보조를 맞춰 가지고 공동적인 행동을 하여 한번에 탕감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 전체적 탕감조건을 어떻게 세우느냐? 이것이 오늘날 통일 식구들이 이뤄 놓아야 할 사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엇을 말하느냐? 행동통일을 말하고 심정 통일을 말하고 이념통일을 말합니다. 우리가 심정과 행동과 이념의 통일을 부르짖게 된 것은 오늘날 우리의 지역과 환경의 위치는 다를지라도 행동적인 면에 있어서 전체가 한꺼번에 탕감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3년 도상에 있어서 선생님이 수고할 때 여러분이 수고하고, 선생님이 고생할 때 우리 통일교회 전부가 고생하는 거예요. 또한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이 고생하고 선생님이 고생하면 하늘도 여기에 보조를 맞추어 역사적인 수고의 대가로서 넘어간다는 거예요. 이것이 오늘날 3년노정이라는 것을 여러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가운데 슬픈 놀음이 있다 할진대는 개인적인 슬픔이 아니예요. 하늘의 슬픔은 우리 전체의 슬픔이요, 하늘의 기쁨은 우리 전체의 기쁨이요, 우리 개체의 기쁨은 하늘땅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 널려 있는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이 생활하는 그 생활은 별개의 생활이 아니예요. 행동적인 일치요, 심정적인 일치요, 이념적인 일치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생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생활권 내에 있어서 통일된 이런 과정을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좋아도 같이 좋아하고, 슬퍼도 같이 슬퍼하고, 울어도 같이 울고, 십자가를 져도 같이 지는 이런 입장에 서야만 됩니다. 하늘이 역사도상에서 탕감적인 기간을 세워서 넘어가고자 하는 이 기간이 오늘날 7년노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7년노정은 어떤 노정이냐? 참된 식구와 참된 형제가 참된 부모와 더불어 넘어가자 하는 기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들이 아무리 홀로 있다 하더라도 하늘의 염려를 대신하고, 책임을 지고 있는 어떤 사람의 염려를 대신하고, 혹은 여러분의 교회 전체의 염려를 대신 책임진 입장에 서 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서로가 전체 목적을 위하여 하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골고다 도상에 선 예수 대신자가 되어서 나가는 여러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당시에 있어서 예수님에게 참다운 동생이 있었다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져야 된다는 거예요. 참다운 누나가 있었다면 그 누나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면 같이 져야 된다는 거예요. 참다운 부모가 있었다면 그 부모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 때 하늘도 같은 입장에서 십자가를 지는 과정을 거쳐갔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와 같은 입장에서 같이 십자가의 길을 넘어갔지만 지상에 있는 예수의 형제라든가 혹은 예수의 제자들은 같이 십자가를 지고 가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서 갈라졌다는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십자가, 가정적인 십자가…. 전부가 세계적으로 갈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한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것을 몽땅 종합하여야 합니다. 예수의 동생은 예수가 가는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여야 되고 예수의 형님 혹은 친척도 예수가 가는 길을 같이 가야 됩니다. 그랬으면 그때에 하늘땅을 위주로 한 가정적인, 전체 식구적인 십자가를 탕감하였을 것인데 그러지 못한 연고로 오늘날 개별적인 십자가를 진 민족이 나온 것입니다. 민족이면 민족, 가정이면 가정 전부가 갈라져서 고난의 길을 거쳐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러면 끝날의 우리 통일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영육을 합한 실체를 가져 가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스승이 지면 제자가 지고, 부모가 지면 자녀가 지고, 형님이 지면 동생이 져야 됩니다. 동생 누나 할 것 없이 전체가 한꺼번에 민족을 대신하고 국가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개를 넘겨 놔야만 하나의 세계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닦아 놓으면 이제 앞으로 오는 세계국가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개인적인 노정, 가정적인 노정, 종족적인 노정, 민족적인 노정, 국가적인 노정 어느 기간에서는 행동 일치하여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고, 기뻐도 같이 기뻐하고, 슬퍼도 같이 슬퍼할 수 있는 노정을 지나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기쁨이 있다면 그때 동참한 사람들도 같은 부활의 기쁨을 느낄 수 있고, 그때에 같은 입장에 동참한 자라야만 예수님이 승리하면 같은 승리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 기준을 넘어갔더라도 앞으로 오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십자가와 가정적인 십자가를 또 나눠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식구라 하니 참된 식구, 참된 형제가 되기 위해서 부모를 위주로 하여 참된 형제의 인연을 갖추어 같이 울고, 같이 싸우고, 같이 십자가를 지고, 같이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자는 것이 7년노정입니다.

지금은 이 민족과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울 때

그러면 참다운 효자 효녀, 참다운 형제는 어떨 것이냐? ‘형님을 수고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십자가를 더 지겠다. 부모를 수고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대신 지겠다. 통일교회 식구들을 고생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대신 지겠다. 혹은 이 민족을 고생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대신 지겠다’ 이러면서 서로서로 큰 환난과 큰 십자가를 다투어 먼저 책임지고자 하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형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비로소 식구 중에서 참다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강원도를 중심삼고 볼 때, 강원도에 널려 있는 통일교회의 지구장이면 지구장, 혹은 지역장이면 지역장들은 피땀 흘려 활동하고,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걸어다니면서 고생하고 있는데, 식구라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자리에서 같이 고생하지 않고, 지구장 지역장은 굶고 다니고 걸어다니는데, 차 타고 다니고 먹고 편안한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굶어도 같이 굶고 먹어도 같이 먹고 울어도 같이 울고 기뻐도 같이 기뻐해야 이 민족적인 사탄을 대결하여 민족적인 골고다를 한꺼번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3년노정을 지나 보냈습니다. 3년노정이라는 것은 가장 귀한 기간이었다는 거예요. 이 기간은 부모님도 눈물을 흘리는 기간이요, 아들딸도 눈물을 흘리는 기간이요, 전체가 합하여 십자가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개인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종족으로부터 한꺼번에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여 국가적인 기준까지 연결시켜 넘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왜? 그 당시에 예수님이 온 것은 한 민족을 거느리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예요.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통합하여 하나의 주권국가를 이루어 가지고 사탄세계에 대결할 수 있는 한 중심 주권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책임이었던 연고로 오늘날 우리의 이념을 중심삼고 볼 때도 개인적인 시대, 가정적인 시대, 종족적인 시대, 민족적인 시대를 거쳐 가지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 국가 앞에 나설 수 있는 하나의 기반을 닦아야 할, 이 전체 탕감노정을 넘어가야 할 기간이 7년노정이라는 것입니다.

내적으로도 승리의 기반을 닦고 외적으로도 승리의 기반을 닦아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2천 년 동안 내적인 기반을 닦고 외적인 재림 이념을 남겨 놓은 거와 마찬가지로 이 땅 위에 오시는 주님도 내적인 기반을 닦고 외적인 기반을 닦아 온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기반을 닦는 것이 3년노정이요, 외적인 기반을 닦는 것이 7년노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종족적인 기반을 중심삼아 가지고 통일 민족을 형성하여 이 민족의 통일 국가적인 기반을 닦아 넘어가야 할 때이기 때문에 오늘날 전 통일교회 식구들은 너나할 것 없이 가정을 위해 싸울 것이 아니요, 이 나라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구하기 전에는 이 세계와 하늘땅은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 이 민족이 가야 할 도상에는 십자가의 길이 남아 있으니 이 십자가의 길을 빨리 터주기 위해서는 내가 이것을 부둥켜 안아야 돼요. 내가 형제들보다도 더 고생을 하고 형제들보다도 더 십자가를 지겠다는 입장에 서야 하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교회 교인들은 한국이라는 이 남한, 삼천리 반도를 중심삼고…. 미국에 있는 식구들, 일본에 있는 식구들도 물론 각자의 나라를 위하여 전도하겠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 백성을 빨리 포위해서 하늘 앞에 굴복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전체가 하나되어 한국을 어떻게….

그러면 오늘날 한국적인 십자가는 누가 져야 되느냐? 통일교회. 한국적인 슬픔은 누가 져야 되느냐? 통일교회가 져야 합니다. 한국적인 환난은 누가 당해야 되느냐? 통일교회가 당해야 합니다. 한국적인 처참상은 누가 당해야 되느냐? 먼저 통일교회가 당해야 됩니다.

이래서 지금까지 우리는 자원하고 다짐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십자가의 길을 도피하지만 하늘은 십자가의 길을 넘어서 찾아가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의 길을 싫어하되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길을 자처해서 넘어가야 됩니다.

한국을 위주로 한 십자가의 고개를 다 넘어선 통일교회 식구는 세계적인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서 세계적인 십자가를 등에 지고 또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사적인 십자가의 탕감고개를 넘어야 통일교회의 식구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찾아 나가는 참된 식구는 어떤 권내에 있어야 되느냐? 하늘이 도울 수 있는 참된 식구라는 것은 국가권 내에 있는 것이 아니예요. 이 권내를 넘어 가지고 세계권 내를 넘어서야만 참된 식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입장에서 참된 식구가 됐다 하더라도 참된 가정적인 십자가의 고개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참된 개인적인 식구는 깨진다는 거예요. 참된 하나의 가정, 그 가정의 식구 식구로서 전부 복귀되었다 하더라도 종족적인 권내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 넘어가야 할 십자가를 짊어지고 싸워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지 못하면 가정적인 식구는 깨진다는 거라구요.

개인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 이 두 세계의 투쟁에 있어서 사탄세계의 권한을 굴복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승리하고 난 후에 가정이 승리하기는 개체가 승리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거라구요. 더 큰 가정적인 십자가가 첨부된다는 거예요. 개체에 있어서는 몸과 마음이 투쟁합니다. 선과 악의 대결에 있어서 악을 굴복시키면 내 개인적인 승리는 할 수 있지만 가정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더 큰 십자가의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가정에서 승리한 개인이 종족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더 큰 십자가, 한 단계 넘어갈 적마다 더 큰 십자가….

그러면 참된 식구는 어떤 식구냐? 개인으로서는 참된 식구가 아니예요. 세계적인 기준을 넘어서야 참된 식구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이런 자리에 나가야만 비로소….

그러면 개인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자녀의 인연을 갖고 자라 나오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예요. 그렇기 때문에 복귀도상에 있어서 야곱과 에서를 중심삼아 가지고 보면 야곱이 개인적으로 승리했습니다. 싸워서 이겼어요. 하란에 가서 가정적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또한 모세는 민족적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예수는 세계적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세계적으로 싸워 이겨 가지고 온 세계를 하늘 앞에 굴복시킨 자리에서 아들로서 등장해야 됩니다. 아들로서 등장하여야 비로소 만왕의 왕이 될 수 있고 만주의 주인된 그분 앞에 아들딸이 될 수 있는데 그 자리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자리에 있어서 아직까지 사명을 완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곳을 향하여 나가기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사적인 과정을 넘어가야만이 참식구로서 비로소 참행복을 노래할 수 있지 이 과정에서는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입장에 각자가 서 있는 연고로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무엇을 보장하고 현재에 식구라고 말하느냐? 앞으로 이 세계사적인 모든 십자가의 고개를 다 탕감하고도 남을 자신을 가진 입장에서 식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자격자로 인정해 가지고 식구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가야 됩니다. 선생도 역시 개인적인 십자가, 가정적인 십자가, 종족적인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민족적인 십자가, 국가적인 십자가가 삼천리 반도에 남아져 있는 연고로 슬픈 일이 있으면 그 슬픈 일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는 가족이예요, 가족. 사탄이 삼천만 민족에게 갖다 주는 모든 슬픈 십자가의 요건을 우리가 몽땅 책임지겠다, 삼천만이 짊어질 수 있는 모든 십자가를 우리가 짊어졌으니 다시 탕감적인 조건으로 세울 수 있는 십자가가 없다 할 수 있게끔 만들어 놔야만 이 민족을….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들은 세계 민족 가운데 제일 불쌍한 민족이다, 이게 선생님 생각이예요. 제일 불쌍한 민족이다 누구보다도 배고파 울고, 누구보다도 헐벗어서 떨고, 누구보다도 비참하게 눈물 흘리지만 거기서 쓰러지는 민족이 아닙니다.

피와 땀과 눈물로 복귀역사에 접붙임을 받아야

예수는 골고다의 십자가를 지고 가다 쓰러지면 또 일어나 갔습니다. 골고다의 산정을 넘어 부활의 한 날을 바라보고 백 번 쓰러지더라도 가야 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했습니다. 승리의 결의와 승리의 각오를 잃지 않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무난히 돌파해 넘어간 거예요.

그런 기반이 있기 때문에 예수는 죽었으되 개인적으로 살아 있다는 입장이요, 가정적으로 살아 있다는 입장이요, 종족적·민족적·국가적·세계적으로 살아 있다는 입장을 재차 확인시켜 놓은 것입니다. 이걸 기반으로 하여 영적인 개인복귀, 가정복귀, 세계복귀…. 이래서 영계 편성이, 낙원 편성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육을 합하여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림이라는 명사를 세워 가지고 지상에 그와 같은 싸움터를 남겨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시는 주님과 주님을 위주로 한 성도들은 예수가 골고다의 길을 가서 영적인 승리를 닦았던 거와 마찬가지로 민족 국가를 대신하여 실체를 쓰고 그 길을 무난히 죽지 않고 돌파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강원도 식구 혹은 남한 각지에, 전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교회 식구들은 여기에 동반하여 전부가…. 미국에서 전도하는 사람은 미국 정부, 미국 나라를 먼저 구하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예요. 한국의 민족적인 기반을…. 일본 사람들이 지금 전도하는 것도 한국을 포위하기 위해서….

이래 가지고 한국이 자리잡으면 전세계에 널려 있는 무리들은 그때서부터 세계적인 발판을 닦고 세계적인 봉사의 길을, 세계적인 슬픔의 길을, 세계적인 십자가의 길을 감당할 수 있는 참다운 식구, 참다운 형제, 참다운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참다운 자녀요, 참다운 형제요, 참다운 식구라고 말하는 것은 십자가에 동참해 나갈 수 있다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벗어나 가지고 행복과 평화를 노래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만, 십자가의 길을 헤쳐 나간 자리에 서야만 참다운 식구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기도하게 될 때…. 지금은 많이 올라왔다는 거예요. 민족을 대신하여 사는 기간을 세워 놓고 우리가 나가는 입장에 있으니 여러분이 기도하게 될 때, ‘하늘이여! 지금까지 개인적인 투쟁의 역사, 가정적인 혹은 종족적인 투쟁의 역사를 거쳐오시기 위하여 눈물과 피땀을 흘리셨으니 나도 그 길에 동참시켜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눈물로 개척해 나왔으니 눈물로 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피땀으로 개척해 나왔으니 피땀으로 합하지 않고는 하나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접을 붙이려면 진액이 통해야지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이런 뜻을 알고 이 민족이 아버지 뜻 앞에 설 때까지 기간은 짧더라도 같은 입장에 서서 그런 고통과 슬픔과 어려움을 당해내지 않고는 개인·가정·종족·민족적인 단계까지 닦아 놓은 터전에 접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전도 나가 고생하고 굶고 걸어다니고 욕먹고 하는 것은 여러분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예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구요. 나는 우리 집을 대신하여 살았다, 우리 형제를 대신하여 내가 십자가를 졌다, 우리 나라를 세우기 위한 터를 마련하기 위하여 간다, 이런 신념을 가져야 되는데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선생님이 순회를 하는데…. 앞으로 젊은이들이 어려운 길을 개척하지 않고 슬픈 길을 자진하여 책임지지 않고는 이 나라 이 민족은….

간절한 심정과 강한 신념으로 싸워 나가야 승리하는 민족이 돼

우리는 과연 하늘과 땅이 기뻐할 수 있는 행복의 자리에서 하늘 앞에 영광을 돌리고 만민을 축복해 줄 수 있느냐? 그런 행복된 자리에서 참다운 형제요, 참다운 자녀요, 참다운 식구를 사랑해 봤느냐? 보면 비참하고 눈물로서 동정해야 되겠고, 하늘땅을 대신하여 뜻이 없으면 저주하고 원망하고 싶은 그런 애달픈 입장에 있어서 식구라는 그 식구는 본연의 식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참을 보장시키기 위한 식구지 참된 식구는 못 됐다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여기에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한 고개를 넘어야 돼요. 우선 최소 단위의 민족적인, 국가적인 십자가 고개를 넘어서야 이 국가를 중심삼고 삼천만 민족이 비로소 하나의 형제요, 하나의 식구요, 하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하여….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됐느냐 이거예요. 반드시 개인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종족·민족·국가·전인류, 하늘땅에 맺혀진 모든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그의 내심은 이 세계적인 십자가의 길을 무난히 돌파해 가지고, 이 십자가의 모든 고난의 길을 넘어서 가지고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간곡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싶은 마음,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십자가의 힘보다도 더 강했기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의 길을 간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간곡한 마음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길을 못 넘어갔을 거예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념적인 참다운 세계에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여 누가 하나님을 모시고 천국을 세우느냐? 천리의 한과 인류의 한과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수많은 한을 전부 다 탕감해 놓고, 하늘의 한과 땅의 한과 인류의 한을 풀어 놓고 하늘 앞에 행복을 노래하고 찬양할 수 있는 참다운 식구요 참다운 아들딸을 그리워하는 자리에서 효자가 되고 열녀가 되고 충신이 되어 하늘을 모시고 싶은 간곡한 마음이 있으면 오늘의 무시무시한 십자가의 길을 밟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강한 신념의 뒷받침이, 그런 강한 소망이 없는 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이 ‘선생님’ 하는 그 선생님은 개인적인 선생님이 아니예요. 민족을 대표한 입장에서의 선생이요, 세계를 대표한 입장에서의 선생입니다. 여러분도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식구가 아니예요. 민족을 대표한 입장의 식구요,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대표한 입장에서의 식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를 대표한 선생의 입장을 보장해야 합니다. 이것 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누가 해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안 하면 딴 민족을 세워서라도 해야 됩니다. 만일에 선생님이 그걸 안 하면 딴 사람이 나와서라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아진 십자가의 길을 우리는 누구와 더불어? 형제와 더불어, 혹은 식구와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하여 자녀의 입장에서 서로가 고난의 길의 선봉에 서서 개척하겠다는 이런 마음이 약화되는 날에는 여러분은 낙오자가 될 것입니다. 패잔병이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오늘날 우리가 슬픈 이 땅 위의 우리 집, 우리 사회, 우리 세계 가운데 이걸 박차고 넘으려고 지금까지 숱한 고난과 역경을 거쳐왔는데 그 고난과 역경이 여러분 앞에 복을 빌어다 주는 고난과 역경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한을 갖다 주는 고난과 역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뜻을 알지 못해서 민족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은 후에 들어온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복받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노정을 지나갈 때 광야의 길이 멀다 해서 ‘아, 나는 힘이 많고 무엇이 많으니 먼저 가자, 나를 따라갈 자가 없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힘이 들어도 같이, 보조를 같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세가 지도하는 길을 따라가야 된다는 거예요. 또 그 대열에서 남이 열 발자국 가는데 내가 다섯 발자국에 갈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문제없지만, 남은 열 발자국 가는데 내가 힘이 없거들랑 열 다섯 발자국이라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남이 일 배의 힘으로 가거든 나도 일 배의 힘으로 따라가면 문제없지만, 내 힘이 부족하고 지쳤거들랑 일 배 반, 이 배의 힘을 가해서라도 가야 할 것이 복귀의 길인데도 불구하고 그 대열을 놓쳐 버리면, 때를 놓쳐 버리면 갈 길이 요원하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신들메를 매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행군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가나안 7족과 여리고 도성을 정복하기 위하여 훈련을 하고 강행군을 하여 목적지까지 달려가는 병사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힘든 것이 문제가 된다면 망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힘든 것을 문제로 하지 않고 여리고성을 중심삼아 가지고 가나안 7족과 싸울 수 있어야 됩니다. 앞으로 더 큰 십자가의 고개가 있고 더 큰 고난의 길이 남아 있으니 그것까지도 단숨에 넘을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갖고 나가야만 남아져 가지고 승리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광야에서 쓰러지는 민족이 된다는 거예요.

참고 참으면서 끝까지 십자가의 길로 총돌진해야

오늘날 여러분들은 이 뜻을 알았으니 가는 도상에 있어서 후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더라도 그 십자가의 길은 하늘이 가는 길이요 참부모가 가는 길이거늘, 그 길이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을 때는 자식이…. 하늘 앞에 충신이 되고 효자 효녀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이 가기 전에 내가 앞장서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귀의 길인 것을 알았으니 지금까지 개인적인 십자가를 내가 모를 때 간 것이 섧다, 가정적인 십자가를 내가 모를 때에 간 것이 섧구나, 종족적이요 민족적인 십자가를 내가 모를 때 간 것이 섧구나! 이제는 알았으니 이 한까지 첨부하여 국가적인 십자가를 내가 짊어지겠다고 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먼저 나온 형님들 누님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기에서 수고하였으니 이제 그 바통을 나에게 주소,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이런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나에게 주소’, ‘아니다. 내가 진다’ 이렇게 싸움이 벌어질 수 있게끔 되어야 됩니다. 만일에 그렇지 못하다면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하면 지금까지 들어왔던 사람들이 또 가자고 하든가,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다시 가자고 하든가 둘 중 하나여야 됩니다.

‘아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그런데 우리야 뭐 그저 그 사람들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되지’ 그러면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앞으로 남아진 십자가가 더 크다는 거라. 과거에 형님들이 살아가던 것보다 더 지긋지긋한 시대가 앞에 남아 있다는 거라구요. 더 큰 시련과 더 큰 무대의 십자가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형님들이 싸워 나온 십자가도 컸지만 그보다도 더 점점 커져 가는 거예요. 이제 나타나는 환경적인 십자가가 더 크니 그 십자가를 대신하여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더 큰 신념을 가지고 ‘수고한 형님, 이제는 내가 길을 개척할 테니 따라오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원래 광야에 온 이스라엘 민족 60만 대중은 다 쓰러지고 2세를 세워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선조들은 40년 동안 다 쓰러지고 2세들이 하늘의 소원인 축복받은 가나안 땅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들이 여호수아 갈렙과 같은 새로운 지도자 밑에서 강하고 담대한 신념을 주입받아 가지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행군한 거와 마찬가지로 지금 여러분들에게 3년 기간은 지났지만 이제 더 큰 4년 기간의 십자가의 노정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노정이 더 크기 때문에 여기에서 지금까지 나온 사람들이 지친 걸 알고 이 사람들이 못 가겠다 하거든 보고 방관하지 말라는 거예요. 새로운 젊은이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가자 이거예요. 재차 동원하여 가자 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그러한 대열이….

그러면 민족적인 십자가, 민족적인 골고다는 누가 책임질 것이냐? 개인적이요, 가정적이요, 종족적이요, 민족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온 선생님은 또 가야 됩니다. 이 길을 향하여 달려가는 거예요. 이런 4년 노정의 기로에 서 있으니 여러분들은 재차 각오하여 참된 식구 참된 형제 참된 자녀를 그리워하면서, 예전에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자유스러운 평화의 동산에서 하나님이 축복해 준 온천하를 자기의 소유로 하고, 하나님을 길이길이 모셔 놓고 천사장을 그 무릎 앞에 종으로 부리고, 온우주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본연의 참다운 자녀의 자리를 그리워하면서 참고 또 참고 나가야 됩니다.

야곱이는 하나님의 장자의 축복을 받고는 그 축복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21년 동안을 꾸준히 싸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00년 동안 고역하는 그런 핍박 도상에 있어서 기필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하나님이 인도한다는 신념을 빼앗기지 않았어요. 통일교회 여러분도 복귀의 해원 성사, 슬프고 슬픈 일, 하늘과 땅에 맺혀져 있는 원한을 해원성사해야 할 것이거늘 누구의 몸뚱이를 통하여 할 것이냐? 내 아들딸을 통해서 하겠느냐, 우리의 형님을 통해서 하겠느냐? ‘나를 통해서 해야 된다’ 이런 신념에 불타야 돼요. 지금은 남아진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총돌진하지 않으면 안 될 엄숙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식구는 심정과 사정과 소망이 일치돼야

오늘날 우리 국가 정세를 보나 국외 정세를 보나 세계는 마지막 판국을 향하여 기울어져 가고 있나니 이 가운데서 이것을 수습하려면 이 기울어져 가는 운세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박차고 넘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이 물결이 세면 셀수록 거기에 딸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맨 가운데서 이것을 거슬러 가지고 밖으로 나와야 돼요.

더욱이 오늘날 이 한국은 세계의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보나 중심이 되고 있고 민주 공산 좌우 진영의 틈바구니에서, 복잡한 삼각 지대권 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마당에 있으니 여기에 그냥 있다가는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박차고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악한 운세를 반대적인 행보로서, 반대적인 노정으로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힘의 움직임, 이것을 감당해 낼 수 있는 그런 민족적인 움직임이 나오지 않고는…. 여기서부터 올바로 풀려 나가는 날에는 이 중심이 서지만, 그렇지 않으면 중심이 안 서요.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젊은이들은 이런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식구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은 곧 가정에 돌아가서 밥을 먹게 되면 밥 먹는 그 가정권 내에 있는 식구가 아니예요. 여러분은 ‘삼천리 반도에 널려 있는 통일의 우리 젊은 형님 누나들은 이 시간도 수고하고 있구나. 내가 여기서 감히 거기에 동참하지 못할지라도 눈물과 더불어 소망과 더불어 심정과 더불어 …’ 이럴 수 있어야 됩니다.

심정과 사정과 소망! (판서하심)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아 가지고 심정이 일치가 되고, 사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소망이 일치되어야 돼요. 사정은 생활이예요, 생활. 사정을 통하지 않고는 하늘과 일체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심정을 통하지 않고는 원칙적인 자리에 설 수 없어요. 소망이 일치하지 않고는 목적의 세계를 이룰 수 없어요.

이 세 가지 가운데 여러분이 심정과 사정이 일치되든가, 심정과 소원이 일치되든가 둘 중의 하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대개 보면 사정을 통하지 못합니다. 지금 복귀의 노정을 거쳐가는데 내가 행동 못 한다고 해서 결코 낙망할 일이 아닙니다. 행동을 못 하거들랑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의 소망은 망하지 않았소이다’ 하고 소망을 끌어당겨 심정에 불타야 된다는 거예요. 이 삼천만 민족 앞에 나가 싸우는 우리 통일의 무리들을 붙들어 가지고 생활적인, 하나님의 사정적인 발판을 내가 만들어 주겠다, 그들이 뜻 앞에 합당하게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는 그런 여건이 있으면 내가 움직이지는 못하더라도 내 마음으로 힘이 되어 보태 주겠다고, 내가 모든 이념적인 기준에 있어서 밀어 주겠다고, 혹은 식구들이 찾아오면 나는 못 가지만 붙들고 눈물 흘려서 그들을 격려하여 또다시 힘차게 갈 수 있는 자극을 일으켜 주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서지 않는 한 망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같이 행동을 해야 됩니다. 행동을 못 하게 되면 찾아오는 그 식구들을 대접하고, 소망을 갖고 찾아오는 식구들에게 더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소망의 마음을 플러스 해줄 수 있는 입장에라도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행동은 못 했지만 하늘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 서지 못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낙망을 주고 후회하게끔 만드는 사람은 식구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 셋을 한꺼번에 다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로되 어떤 딱한 사정이 있어서 다 하지 못할 때에는 둘이라도 해야 돼요, 둘이라도. 내 사정은 아무개가 대신해 준다는 거예요. 그들을 위하여 마음으로 기도해 주고 눈물을 흘려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찾아오게 되면 격려해서 자기의 소원을 향하여 달려 나갈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을 더해 줘 가지고 그가 찾아왔던 보람을 느끼고 힘을 느껴서 ‘대신 내가 싸우겠습니다’라고 하게끔 만들어야 형제지 그러지 않고 박대하고 ‘뭘 또 왔어’ 그러는 사람은 식구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식구가 뭐냐? 눈물짓는 자리에서는 혼자 눈물짓는 것보다 식구와 더불어 눈물지으면서 기도하고 싶은 거예요. 십자가 고통의 자리에 있게 될 때 혼자 고통을 받으며 기도하는 것보다는 둘이 기도하면 기도가 빨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기도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이루어 주겠다 하셨습니다. 그게 창조원칙이예요. 주고받으면 반드시 거기에는 번식이 벌어지는 거예요. 번식이 벌어지면, 주체적인 하늘은 반드시…. 4위기대를 조성한 이념 권내가 벌어지면 하늘이 여기에 개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길을 가는 신앙생활을 하는 식구들에게 있어서는 외로움이 부딪쳐 오는 것이요 혹은 슬픔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 환난이 부딪쳐 올 적마다 반드시 상대적인 식구를 그리워하게 된다는 거예요. 혼자 슬퍼하는 것보다는 찾아가 가지고 식구를 붙들고 자기 사정을 토로하게 될 때 그 식구를 대신하여 같이 힘을 보충해 줄 수 있고, 힘을 북돋워 줄 수 있다는 거예요. 같이 격려하여 우리의 원수를 기필코 굴복시키고 말겠다고 서로서로 위로해 주고 서로서로 힘이 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하는 것은 식구가 아니요, 형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늘이 바라고 바라던 참다운 식구가 되어 끝까지 싸워 나가야

이러한 관점에 있어서 오늘날 일선에 나가 싸우는 사람들은 직접적인 십자가를 당하는 사람들이예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 대해서 ‘십자가를 진 자리에서 낙망하지 마시오. 앞으로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때가 오나니 참고 가소!’라고 해야 됩니다. ‘동생아, 내가 가겠다’ 혹은 ‘형님이여, 내가 갑니다’ 할 수 있는 격려의 뒷받침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만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사랑하는 세 제자가 십자가에 달려서 ‘주여! 당신의 어려움을 참으시옵소서. 우리의 한을 기필코 천상에서부터 우리 후손들로부터 갚아 줄 것입니다’ 이랬다면 얼마나 예수님의 힘이 됐겠어요? 그랬으면 그 죽는 자리에서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런 기도를 하지 않고 ‘아바 아버지여 이들을 보시사 이 세계의 원한을 빨리 탕감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그런 기도를 했던들 오늘날 이렇게 2천 년까지 안 내려왔어요.

하늘 앞에 예수께서 ‘이 사랑하는 제자들이 만민의 모든 십자가를 대신 졌으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들은 내 죽음의 길에 있어서 힘을 준 자들이요, 하늘 앞에 자기의 죽음을 잊어버리고 나를 위해 봉사한 자들이옵니다. 하늘이 찾고자 하는 아들딸도 그런 아들딸이 아닙니까?’ 그랬을 것인데 그러한 입장에 서지 못한 예수는 서글펐던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의 무리들은 어려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역사도상에 있어서 비로소 우리들은 식구라는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형제자매라는 명사를 쓰고 있다는 거예요. 이 거룩한 명사!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이 명사는 없어져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역사는 심판을 받아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시대는 심판을 받아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명사와 이 실체들은 남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은 청산되더라도 이 소망의 식구와 소망의 가정과 소망의 형제는 남아져야 돼요.

그러려면, 이 소망의 식구들이 남아지려면 세계사적인 십자가의 길을 넘어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들에게 개인적인 십자가는 물론이요,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 더 나아가서는 천주적인 십자가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4천 년 동안 닦은 터 위에 예수를 보내 가지고 수고한 것이 뭐냐?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수습하고, 민족을 중심삼은 주권국가를 복귀하기 위한 것이 예수의 사명이었다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도 이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 삼천리 반도, 한민족, 대한민국이 지금 여지없이 혼란되는 것을 막아 주는 지름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형이 갔으니 동생은 따라가야 돼요. 동생이 가고자 하니 형은 따라가야 돼요. 부모가 가니 자녀들도 가야 돼요. 자녀들이 가니 부모도 같이 가야 됩니다. 공동적 책임하에서 하나의 가정을 이끌어 가야 되고, 하나의 종족을 이끌어 가야 되고, 종족으로서 민족을 이끌어 가야 되고, 민족으로서 국가를 이끌어 가야 되고, 국가로서 세계를 이끌어 가야 되고, 세계로서 천주를 이끌어 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십자가를 개척하면서 가야 할 사명이 복귀도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시대 단계 단계를 넘어오면서 걸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젊어요. 여기 대다수를 보면 젊은 사람들이라구요. ‘이제 나는 하늘의 뜻을 알았다. 내 몸과 내 감정은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기를 바라고, 우리가 소원하던 행복의 터전 위에서 자유 해방을 노래할 수 있는 평화의 가정, 평화의 식구, 평화의 형제를 그리워하나니 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누가 빼앗아 갈소냐’ 이거예요.

그리하여 이 형제들로서 이룰 수 있는 하나의 나라, 하나의 세계, 하나의 아버지, 저 대주재 되시는 하나님을 위주로 하고 참부모를 위주로 한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중심인 하나님으로부터 참부모가 기뻐하게 될 때, 거기서부터 기쁨이 벌어져서 온 천상천하에 기쁨이 미치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원을 백번 천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잊어버리지 않고 가는 여러분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해결해야 될 최대의 의무요, 타락한 인간들이 가야 할 최대의 십자가의 길이니 오늘날 조그만 십자가의 길에서….

여러분이 자는 시간에도 뜻을 품은 우리의 형님 누님, 혹은 식구들 가운데 자지 않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배부를 때에 굶주리는 식구가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밥을 먹어도 눈물 어린 마음, 잠을 자도 눈물 어린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하여 영적인 힘으로 도와주고 기도로서 호소하여 제단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언제든지 제단을 깨끗이 청소하고 대기하고 있사오니 밤이나 낮이나 언제든지 나를 통하여 드릴 수 있는 제물이 돼 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스스로 행동과 실제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거든 그러한 내적 준비라도 같이 하는 무리, 같이 싸워 나가는 여러분이 돼야 환난도상의 십자가의 과정을 거치는 식구의 인연이라도 붙들고 나올 수 있지 그러지 않고는 지금 싸우고 있는 그들과는 오래지 않은 기간 내에 갈라지고 만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낙오되어, 패잔병이 되어 가지고….

우리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제일 안전한 생활방법, 안전한 걸음걸이는 무엇이냐? 일선에 서서…. 폭풍우를 거슬러 가고, 모든 십자가의 도상에 있어서 이를 악물고 일보 일보 전진하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게 정도라는 거예요. 그게 정상적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슬픔을 느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설명 가지고는 통하지 않아요. 그런 자리에서 눈물 흘리면서 ‘아버지!’ 하게 될 때 역사적인 십자가를 짊어진 아버지의 사정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내가 아버지 앞에 효자가 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오냐, 그런 자리에서 참다운 효자 효녀가 될 수 있는 아들딸을 만나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으니 오 아무개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효자 효녀 충신 열녀의 이름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편안한 자리에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의 우리들은 농사를 지으나 무슨 일을 하나 머물러 있는 그 직장에 있어서는 호미자루를 쥐고 있다 할지라도 삼천리 강산을 파서 뒤넘이치는 거와 같이, 세계를 파서 넘기는 거와 같이 해야 됩니다. ‘우리의 한을 풀어 주시옵소서! 내 소원 성취의 날을 풀어 주시옵소서’ 하며 있는 정성을 다하여 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나간 사람들과 심정적으로든가 사정적으로든가 소망적으로라도 동료가 돼 가지고 같은 십자가의 고빗길을 간다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여러분은 어느 사이에….

그립고도 소망하던 참다운 우리 식구, 하늘이 바라던 참다운 자녀, 참다운 가정을 건설해야 됩니다. 누가? 이 손과 이 몸뚱이가. 하나님 혼자서는 안 돼요. 하나님 혼자 할 수 없어요. 하나님 혼자 할 수 있었으면 6천 년까지 안 내려온단 말이예요. 번번이 인간들이 못 했기 때문에….

이 민족과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맨 밑창에서부터 수고해야

오늘날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많이 왔습니다. 개인적이요, 가정적이요, 종족적이요, 민족적인 과정을 거쳐 이 국가 민족을 우리가 책임지고 싸워야 되겠다는 이런 신념….

여러분들, 이 민족을 바라볼 때 이 민족은 나라에 대하여 자신을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에 대한 애착심을 다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부모에 대한 애착심도 자식에 대한 애착심도 다 중요시하지 않는 때라는 겁니다. 모든 걸 다 잃어버렸어요. 나라에 대한 것도, 의리니 뭐니 하는 것도 모든 걸 잃어버렸어요.

또 그다음에는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민족을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 어떻게 하늘이 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고 그런 애착심을 일으켜 가지고 하늘 백성을 만들 것이냐? 여러분 그거 생각해 봤어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자기 선조를 탄하여 ‘어찌하여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비참하게 일생 동안 호미자루를 쥐게 만들었노’ 이러는데, 이래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선은 도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예요. 선은 궁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예요. 도리어 도시에 악이 더 많은 것이요, 도리어 궁전에 악이 더 많은 것입니다. 농촌에 더 순진한 선이 있는 거라구요. 선을 안 사람은 빈부귀천을 초월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선을 향해서는 낮은 자리나 천한 자리나 개의치 않고 지극히 악한 궁전보다도 더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생명을 각오하는 것이 도리예요. 그런 사람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오늘날 한민족을 바라볼 때, 무슨 애착심이 없어요. 관심이 없어요. 그러면 통일교인은 뭘할 것이냐? 그러한 환경이 되어 온 연고로 오늘날 우리는 3년노정과 7년노정을 거쳐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락에 들어가게 되면 뭘할 것이냐? 농촌에 가게 되면 호미자루를 쥐고 지금까지 농민들이 무시하던 농토를 갈고 닦는 거예요. 진정 심혈을 기울여 눈물을 흘리면서 땅을 파는 거예요. 자녀들이 무식한 것은 부모들이 무식한 탓이니 오늘날 우리들은 그 자녀를 붙들고 가르치자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무관심했으니 거기서 우리는 하늘을…. 이 민족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개인주의적 입장에 있으니, 나라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애착심이 없으니 이것을 길러 줘야 되겠다는 거예요.

조그만 한 소녀가 혹은 소년이 그 부락에 들어가게 될 때 반대받는 입장에 서면, 보면 일면으론 원통하고 분하지마는 관심을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는 제일 좋은 입장에 있다는 거예요. 전부 다 나쁘다는 입장에 스스로 들어가서 원리 말씀을 전하고 봉사하니 총 단결해서 반대한다는 거예요. 싫든 좋든 나쁘든간에 어쨌든 자기들이 나쁘다고 생각해서 동원되더라도 전체가 하나되어 동원된다는 거라구요.

이래 가지고 자기 멋대로 욕도 해보고 천대도 해보고 할 짓 다 해봤다는 거예요. 그러나 지내 놓고 보니 ‘내가 이 땅을 위하여 눈물 흘리지 못했는데 저들은 이 땅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고, 내가 자녀들을 위하여 가르칠 것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저들은 자녀들을 가르쳤고, 나는 지방의 유지요 책임자인데도 나라를 위하고 이 민족을 위하여 눈물 흘리지 못하고 희생하지 못했는데 저들은 그렇게 했다. 우리들이 잘 하려고 했지만서도, 옳은 입장에서 했다고 하지만서도 지내고 보니 저들은 이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고, 저들은 우리들의 농촌을 위하여 땀을 흘렸고, 우리 자녀를 위하여 피땀을 개의치 아니하고 고생의 길, 굶주림의 길, 핍박의 길도 참고 나갔다. 나는 뭘 했던고?’ 이렇게 반성시키는 거예요.

그거 보면 난 생각합니다. 통일교회가 욕먹기를 잘했다 이거예요. 왜? 어떡하든지 반대를 하더라도 전체가 반대하니 관심을 갖게 된다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지내다 보니 자기들이 잘못된 걸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이 어린 그들이 눈물 흘리는 걸 바라보고 굶주린 생활을 바라보고 비참한 고난 가운데서도 참고 도리어 자기들을 위하여 수고한 걸 알게 될 때 이들은 전부가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아무개가 이 논뚝에서 혹은 이 밭고랑에서 눈물 흘리며 김을 맸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건 왜? 우리를 위함이요, 그 나이 어린 청소년이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그랬다는 것을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동네를 자기 동네와 같이, 이장이니 무엇이니 책임진 사람들이 돌보지 않아도 타지방의 관계 없는 청소년들이 와 가지고 그 부락에 관심을 갖고 자기 집과 같이 거느리고 품고 뒤넘이치면서 자기의 일신은 초라해지고 비참해지고 처량해지는 걸 잊어버리고 움직였던 것이 말없는 표어가 된다는 거예요. 관심 없던 이 민족에게 관심사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 여러분들이 고생했던 것이 얼마나….

이래 가지고 3년 동안 우리는 뭘했나? 한 거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적은 교인들을 삼천리 반도에 골고루 파송시켜 놓은 거예요. 전도하는 거예요. 가서 고생해라, 붙들고 눈물 흘리면서 고생해라, 피땀 흘리면서 감사해라! 그러면 가고 난 후에 생각하는 사람들은 ‘야, 아무개야! 여기 왔던 통일교회 청소년들은 우리 손자 같은 나이요, 우리 아들딸과 같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알고 보니 우리보다도 나이 많은 사람보다도 누구보다도…’ 하는 거예요. 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없어졌더라도 자기 자식들 대하여 마음으로 ‘야 이녀석아, 너 아무때 그 통일교회 청년같이 됐으면 좋겠다’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나 부모네들이 그렇게 생각이라도 한다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니 자식들 대해서 진정한 마음을 가져 가지고 한마디 교훈이라도 할 수 있는 기반이 닦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체적인 원칙을 그 부락민 앞에, 양심을 가진 유지들의 마음 앞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자극이라도 줘야 돼요. 이래서 이 민족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통일교회 사람과 같이 저렇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방향을 세워 주자는 것이 3년 기간에 선생님이 바라는 목표입니다. 이것이 맞았단 말입니다.

지난번 여러분이 전도 갔다 왔지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남지 않았는데 무엇이 남았느냐? 욕먹은 건 남고, 굶은 건 남고, 걸어 다니느라 발바닥이 찢어지면서 다비(たび;양말, 버선)짝 끌고 다닌 건 남고, 째진 양복 입고 다니면서 천대받은 건 남았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들은 죽지 않았다 이거예요. 그 부락이 발전 못했더라도 그들이 움직이면 발전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떠나더라도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랬을까? 그들이 온 뒤에 그렇게 됐어? 뭐 어떻게 돼 그래?’ 한다는 거예요. 어차피 걸릴 수 있는 관심의 조건을 제시해 준 거예요. 그 조건을 마음에서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실증적인 사실들이 그들의 생활무대에, 그들의 마음 자리에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이 한때에 가서는 동기가 되어 ‘통일의 무리가 이렇다’ 하게 될 때는 그것을 되살려 가지고 제2의 출발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기반을 닦는 데 우리는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전도 못 했다고 낙망하지 않습니다. 3년노정에서 큰 성과 거둘 것을 원치 않았어요. 만일 한 도면 한 도에 집중해서 4,5천 명을 동원했던들 오늘 통일교인은 지금의 몇십 배 혹은 몇백 배 교인들이 됐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있는 정성을 다하여 끝까지 싸워 나가는 통일교인이 돼야

나라에 관심 없는 민족을 나라에 관심 가질 수 있는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젊은이들의 피땀을 통하여 교육해야 되겠고, 농토에 관심 없는 사람들을, 애착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우리 젊은이들의 피땀을 통하여 가르쳐야 되겠고, 부모에 대하여 효도하지 못하는 자녀가 있으면 그런 가정에 모범이 되어서 말없이 교훈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가정에 관심 없었던 이 민족에게 가정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의 조건을 만드는 거예요. 이걸 알아야…. 전도할 게 뭐예요? 가서 후퇴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번에 여러분이 탕감기금을 통해서…. 이런 역사적인 모든 탕감의 조건을 세우기 위해서 하늘이 역사하는 것인데 여기에 비례하는 비참한 역사가…. 이 기간이 끝날 때 내가 통곡하며 기도하고 싶은 거예요. ‘이러이러한 통일의 무리들은 피어린 길을 걸어왔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지 못할 이런 지긋지긋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하는 기도 말이예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만민은 우리 수중에 넘어온다는 거예요.

하늘에 대한 관심이 없는 이 세계 인류, 천지에 관심이 없는 이 인류를 그런 면에서 전부 다 굴복시키려는 것입니다. 엄숙한 과제면 과제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을 수습해야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를 심판하고 새로운 천지에 복지의 터전의 기반을 닦아 놓자는 것이 7년노정이예요. 이리하여 모든 엉클어져 있는 갈래 갈래 십자가의 길을 우리가 헤치고 나가면 안 뚫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 뚫어질 방향이 없다는 이러한 기준에서 민족적인 십자가의 골짜기 길을 우리들이 자진해 가자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요, 민족을 위한 삶이요, 나를 위해 감이 아니요 민족을 위해 가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세워서는 뭘할 것이냐? 세계를 구하기 위함이라.

참다운 하늘 가정, 하늘 식구, 하늘 형제, 하늘 부모를 그리워하며 천지에 대가정을 내가 죽기 전에 이 땅 위에 건설하여야 하겠다는 거예요.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 죽어서라도 다시 해원성사하도록 이 땅 위에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남아 있다는 걸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들은 있는 정성을 다하여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거리에 가다가 악당을 보게 되면 손을 내밀어 들이 패지는 못하더라도 ‘이 자식들 몇 해 후에 보자’, 이런 불의의 존재들이 여러분이 사는 부락에 있게 되면 ‘보자! 이것들이 우리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이것들이 십자가의 요건이 되는구나.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을 모시는 입장에서 지극히 깨끗하고 선한 것을 갖다가 모시고, 사랑하는 부부면 부부끼리 먹고 사는 거기에 있어서 지극히 깨끗한 것을 먹고, 자식을 키우는 데 있어서 지극히 깨끗한 걸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부 다 보게 되면 그저 사바사바해 가지고 하늘땅을 속이고, 자기 양심을 속이고, 자기 조상을 속이고, 자기 후손을 속이는 거예요. 안 그래요? 천지는 아는 겁니다. 여러분 양심은 아는 거예요. 자기 처자를 속이고 민족을 속이고 하늘땅을 속여 가지고 될 게 뭐예요? 차라리 시래기죽을 먹고 죽 한 끼 먹는 한이 있더라도 깨끗하게, 하늘땅 앞에 공정한 입장에서 사랑하는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먹여 살리는데 참것으로 먹여 살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먹여 살리는데 참것으로 먹여 살리는 이러한 전통을 세워 놓지 않는 자는 망한다는 거예요.

우리 통일교회 가는 길에 있어서 선생님은 철두철미합니다. 어떤 개체의 욕망을 위해 공적인 뜻을 떠나서 나가는 사람 두고 보라는 거예요. 그런 의분심을 가져 가지고 원리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 식구는 우리 가족 앞에, 우리 형제들 앞에 원수예요. 하늘 앞에 천사장이 원수가 된 거와 마찬가지로 아담 해와도 역대 수천 년의 역사적인 원수가 된 거예요. 전 인류는 이것을 벗어나야 할 해원의 노정이 남아 있는 걸 생각하게 될 때 원통하고 지긋지긋합니다.

출발이 선하니 선한 생활을 통하여 선한 목적지까지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동기로부터 결과까지 가기 위해서는 과정을 거치되 과정의 생활무대도 역시 깨끗한 동기로부터 깨끗한 목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생활무대가 되기 위해서는 정의로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옳은 것만으로 통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옳은 것으로 나서, 옳은 것으로 먹고 살고, 옳은 것으로 일하고, 옳은 것으로서 수습하여 하늘 앞에 드리고 가야 할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데 오늘날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것은….

야곱 같은 양반은 에서 앞에서 무슨 사바사바해 가지고…. 그건 일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악한 세상을 제거시키기 위한 한 방편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달라요.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두 눈은 먹는 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예요. 내가 살고 있는 현세의 이 사회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정의, 하늘의 도리를 따라 그 나라를 위해 나는 칼을 빼들고 나선 용사이니 승패를 겨뤄야 되는 싸움터에 나선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다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기 위해 생명을 걸고 싸워 나가라

여러분 결정체 알지요? 아무리 부서뜨려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구요. 우리의 집, 우리의 나라, 우리의 가족, 우리의 식구, 우리의 형제를 위한…. 거기에 대한 생활적인 본질은 전부 다 일체예요, 일체. 선생님이 식구들을 불러 보면, 강원도면 강원도 식구들을 불러 보면 ‘나를 어찌하여 이런 지역에 보내려 합니까’ 하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어요. 가만 보니까 편안하거든요. 언제 밥을 굶어 봤어요? 밥 굶으려야 굶을 수 없어요. 언제 욕을 먹어 봤어요? 욕 먹으려야 욕 먹을 수 없다는 거예요. 편안하단 말이예요. 대다수가 조금만 어려워도 싫어하는데 말이예요. 어려운 곳을 책임져야 합니다. 자기가 그런 어려운 곳에서 싸워 승리하면 더 큰 무대에서 사탄을 정복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런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강원도 어디가 뚫기 힘들어? 날 보내 줘, 날. 그 사람이 10배 해서 안 뚫렸으면 나는 20배 하겠다. 20배로 안 되면 30배 하마’ 이런 게 필요한 거예요. 그래 그 사람이 30배 해서 승리하여 굴복시키면 그를 일으켜 30배 이상의 더 큰 무대에 내세워서 책임을 지고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자기가 현재 책임진 그 분야에 있어서 남아진 여력이 있어야 더 큰 것을 맡을 수 있지요.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이 젊은 놈들 가만 보면 말이예요. 내가 지방에 순회 가게 되면 돼먹지 않은 것들이 있거든요. 그래 가지고 되겠어요? 그 이상의 시련과 그 이상의 자리에 서게 될 때 그들은 전부 다…. 선생님도 여러분들 같은 나이에 벌써 나는 이런 길을 간다고 각오했었습니다. 그러니 뭐 낙망이니 무엇이니 거 없다구요. 참된 우리 집을 찾으러 가는 길이니 참되지 못한 모든 여건 속에서 승리하고 가야 됩니다. 삼켜 버려야 돼요. 피하면 안 돼요. 통일교회가 강원도에서는 얼마만큼 세력 있나요? 응? (녹음상태 불량으로 일부 수록하지 못함)

부락에 가게 되면, 부락에 가 가지고 부락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꼴래미를 잡지 말라는 거예요. 대가리를 잡으라는 겁니다. 그걸 잡기 위한 작전을 하려니 그 조그만 것은 미끼로…. 그런 작전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그 사람을 잡기 위해서는 내가 생사를 걸어 놓고…. 만약 그 사람이 지식이 있다면 내가 그 지식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는 거예요, 1년이고 2년이고. 공부하고 보자 이거예요. 여기에는 그런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3년 후에든가 혹은 5년 후에 두고 보자 이럴 수 있는 무리들이 방방곡곡 혹은 면, 리까지 선생님이 배치를…. 그런데 그런 패들이 없어요. 지금 면이 한 2천 4백 개 됩니다. 그저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거예요. 닻줄을 걸어 놓고 그저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 이렇게 했더라면 3년 동안 어떻게 되겠어요?

그리고 이 한 시대에 있어서 3수를 넘어가야 됩니다. 주권에 있어서 자유당, 민주당, 혁명 정부 지나가야 돼요. 그저 잡아죽이려고…. 그렇다고 그걸 무서워하면 안 됩니다. 자신을 갖고 나가면 반드시 최후에 가 가지고는 정의가 승리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그런 거 하고 싶지요? 뭐 젊은 놈들은 그런 모험도 해봐야 된다는 거예요. ‘하늘이 있니, 없니? 하나님이 죽었나, 살았나?’ 그런 곳에 가 봐야 아는 거예요. ‘야, 우리 아버지 참 멋지다!’ 그거 알아요? 알아요, 여러분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뭐 하늘나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요? 모르고 희미하기 때문에 그렇지요.

여러분들,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걸 알고는 가만있겠어요? 그걸 빼앗으려고 하면 그거 내 것이라고, 내가 먼저 발견했다고 생명을 내놓고 싸울 거예요. 여러분, 천국이 다이아몬드 광산보다 못해요. 진짜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희미하니까 그렇지 진짜 맛을 알아 봐라 이겁니다. 내가 주인인데, 상속받을 수 있는데, 갈 수 있는데 사탄이가 뭐예요? 원수가 있으면 생사를 결단하고라도 가게 돼 있어요. 다 뭘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가다가 지칠 수가 있어요?

이제 하나님을 봐야 확실히 믿을 거예요. 그러니 싸움을 해봐야 됩니다. 자, 네가 죽나, 내가 죽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몰리고 몰려도 어떻게 돼요. 하늘 길은 말이예요…. 통일교회가 욕먹을 때는 망해 없어질 것 같고 지긋지긋해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이것이 얼마나 멋져요. 이 민족을 한꺼번에 뒤집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입니다.

반대하는 패들이 와서 살고 득실대니 이게 뭐냐고 소동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전부가 ‘야 야!’ 이러다 보니 관심을 갖게 되는 거예요. 하고 보니 자기들이 잘못했거든요. 잘못했는지 양심이 알거든요. 자기가 그 사람만큼 못했거든요. 모든 면에서 못했거든요. 전부가,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면에서 배워야 되겠거든요. 양심에 호소하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선생님이 여기에 대해서 선전을 묘하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민족을 위해서 이렇게 매를 맞고 비참한 일을 당했다고 양심에 호소하는 거예요. 젊은이들 모아 가지고 호소하게 되면 전부 다…. (이후의 말씀은 녹음이 되어 있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