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타락(墮落)은 비록 인간 자신의 잘못으로 되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타락인간을 구원(救援)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데 대하여는 이미 전편 제3장 제2절 Ⅰ에서 논한 바 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 타락인간을 복귀(復歸)하시려는 섭리는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미 서론(緖論)에서 논한 바와 같이, 아담은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위치(中間位置)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중간 위치에 처해 있었던 타락인간(墮落人間)을 하늘편으로 분립(分立)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는 타락인간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야만 했었다. 그러므로 아담가정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우고, 그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Ⅰ. 믿음의 기대
첫째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한 어떠한 조건물(條件物)이 있어야 한다. 원래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조건으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진 타락한 아담이 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가 믿음으로써 말씀 대신의 어떠한 조건물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세워야만 했던 것이다. 아담가정에서 세워야 했던 이 말씀 대신의 조건물은 제물(祭物)이었다.
둘째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 기대를 복귀할 수 있는 중심인물(中 心人物)이 있어야 한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했던 중심인물은 물론 아담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응당 제물을 바쳐야 하였던 것이고, 그가 이 제물을 합당하게 바치는가 바치지 못하는가에 따라 ‘믿음의 기대’의 조성 여부가 결정될 것이었다.
그러나 성서(聖書)의 기록을 보면, 아담이 제물을 바치지 못하고 가인과 아벨로부터 제물을 바쳤던 것이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한 주인을 대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주인을 대하는 입장에 있는 존재를 상대로 하여 창조원리적인 섭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제물을 대하신다면, 사탄도 또한 아담과 혈연관계(血緣關係)가 있음을 조건삼아 이것들을 대하려고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아담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을 대하는 비원리적(非原理的)인 입장에 서게 된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비원리적인 섭리를 하실 수 없으므로 선 악 두 성품의 모체가 된 아담을 선성품적(善性稟的)인 존재와 악성품적(惡性 稟的)인 존재의 둘로 갈라 세우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아담의 두 아들을 각각 선악(善惡)의 표시체로 분립시킨 후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탄을 각각 대할 수 있는, 즉 한 주인 상대의 원리적인 입장에 세워 놓고 제각기 제물(祭物)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은 다 같이 아담의 자식인데 누구를 선의 표시체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우고, 또 누구를 악의 표시체로서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야 할 것이었던가?
가인과 아벨은 다 함께 해와의 타락의 열매였다. 따라서 타락의 모체(母體)인 해와의 타락 경로에 의하여서 그것이 결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해와의 타락은 두 가지의 불륜(不倫)한 사랑의 행동으로 인하여 성립되었었다. 즉 첫째 번은 천사장(天使長)과의 사랑으로 인한 영적 타락(靈的 墮落)이었으며, 둘째 번은 아담과의 사랑으로 인한 육적 타락(肉的 墮落)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똑같은 타락행위(墮落行爲)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둘 가 운데서 어느 것이 보다 원리적이며 보다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를 가려 본다면, 첫째 번의 사랑에 의한 타락행위보다는 둘째 번의 사랑에 의한 타락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번의 타락행위가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지려고 한, 즉 때 아닌 때에 때의 것을 바라는 과분한 욕망이 동기가 되어(창 3 : 5) 비원리적 상대인 천사장과 관계를 맺었던 것임에 비하여, 둘째 번의 타락행위는 첫째 번의 행위가 불륜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편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심정이 동기가 되어, 아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원리적 상대인 아담과 관계를 맺었던 것이기 때문이다(전편 제2장 제2절 Ⅱ).
그런데 가인과 아벨은 모두 해와의 불륜한 사랑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해와를 중심하고 맺어진 두 형의 불륜한 사랑의 행위들을 조건으로 가름하여 가인과 아벨을 각각 상이(相異)한 두 표시적 입장에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가인은 사랑의 첫 열매이므로 그 첫째 번 것이었던 천사장(天使長)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표징(表徵)하는 악의 표시체로서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고, 아벨은 사랑의 둘째 열매이므로 그 둘째 번 것이었던 아담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표징하는 선의 표시체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던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의 세계를 사탄이 먼저 점유하였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앞서 사탄이 먼저 비원리적인 입장에서 그 원리형(原理型)의 세계를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이 맏이를 세워서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계승시키려고 하셨던 원리적인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도 둘째 것에보다도 맏것에 대한 미련이 더욱 컸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사탄은 그때 이미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점유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보다 미련이 컸던 장자 가인을 먼저 취하려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탄이 미련을 갖고 대하는 가인보다도 아벨을 대하셨던 것이다.
이에 대한 실례를 우리는 성서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사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창 4 : 7)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보면 가인은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 사실임을 알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급시(出埃及時)에 애급민족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생축(牲畜)까지도 맏것은 모조리 쳤던 것이니(출 12 : 29), 그것들은 모두 가인의 입장으로서 사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는 차자 아벨의 입장이었던 레위의 손(孫)만이 법궤(法櫃)를 메고 갔었다(신 31 : 25).
그리고 창세기 25장 23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직도 출생 전 복중의 태아(胎兒)들이었던 장자(長子) 에서를 미워하고 차자(次子)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장·차자라는 명분만으로써 그들은 이미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야곱이 그의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동시에 축복할 때에, 차자 에브라임을 우선적으로 축복하기 위하여 손을 엇바꾸어서 축복하였던 것도(창 48 : 14) 역시 에브라임이 아벨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서 하나님과 사탄을 각각 한 주인으로서 대할 수 있는 위치에 아벨과 가인을 세워 놓고 제물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창 4 : 3∼5).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祭物)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가? 아벨은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히 11 : 4)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셨다(창 4 : 4). 그리하여 아담가정이 세워야 할 ‘믿음의 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타락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조건만 성립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容納)하신다는 것을 교시(敎示)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던 것은 가인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다만 가인은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졌었으므로 하나님이 그 제물을 취하실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가인 자신이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것을 취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써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편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그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을 교시하신 것이다.
그러면 가인은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였던가? 그것은 바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었는데, 이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자세히 밝히기로 하겠다.
Ⅱ. 실체기대
아담가정에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세워지기 위하여는, 가인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이 그의 헌제(獻祭)를 기뻐 받으실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어떻게 세워야 하였던가?
인간 시조(始祖)는 천사장(天使長)으로 말미암아 타락되어 그로부터 타락성(墮落性)을 계승하게 되었으므로, 타락인간이 그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탕감복귀원리(蕩減復歸原理)에 의하여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가지게 되었던 것과 반대의 경로를 취하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천사장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던 아담을 사랑하지 못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을 사랑하여서 하나님의 입장과 같은 입장을 취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사장(天使長)이 하나님에게 더 가까웠던 아담을 중보(仲保)로 세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아담의 위치를 취하려다가 타락되었기 때문에 ‘자기 위치를 떠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을 중보로 세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천사장은 자기를 주관해야 할 인간, 즉 해와와 아담을 역주관(逆主管)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주관성을 전도(顚倒)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따라서 인간이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그의 주관을 받는 입장에 섬으로써 주관성의 법도(法度)를 바로 세워야 했던 것이다.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는 선한 뜻을 하나님은 아담에게 전하고, 아담은 또 해와에게 전하고, 해와는 다시 천사장에게 전하여 선을 번식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천사장은 따먹어도 좋다는 불의(不義)의 뜻을 해와에게 전했고, 또 해와는 그것을 아담에게 전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죄를 번식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자기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서 있는 아벨의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여 아벨로부터 선의 뜻을 전해 받음으로써 선을 번식하는 입장을 조성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인 아벨의 헌제(獻祭)와 상통되는 몇 가지의 실례(實例)를 들어 보기로 하자.
우리의 개체를 두고 생각해 볼 때, 선을 지향하는 마음(롬 7 : 22)은 아벨의 입장이요, 죄의 법을 섬기는 몸(롬 7 : 25)은 가인의 입장인 것이다. 따라서 몸은 마음의 명령에 순종굴복(順從屈伏)해야만 우리 개체는 선화(善化)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이 마음의 명령에 반역(反逆)하여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은 입장을 반복하기 때문에 개체는 악화(惡化)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道)의 생활은 마치 아벨에게 가인이 순응해야 했듯이 하늘 뜻을 지향하는 마음의 명령에 몸을 순응케 하는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墮落)되어 만물보다도 거짓된(렘 17 : 9) 입장에 떨어졌으므로 만물을 아벨의 입장에 세워 놓고 그것을 통하여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헌제(獻祭)였다. 인간이 항상 좋은 지도자나 친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보다 하늘편에 가까운 아벨형의 존재를 찾아 그와 하나됨으로써 하늘 앞에 가까이 서고자 하는 천심(天心)에서 일어나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온유겸손(溫柔謙遜)이 기독교 신앙의 강령이 된 것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기도 모르게 아벨형의 인물을 만나 그를 통하여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게 하기 위함이다. 개인에서부터 가정, 사회, 민족,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거기에는 반드시 가인과 아벨의 두 형의 존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든 것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가인형의 존재가 아벨형의 존재에게 순종굴복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인류가 그에게 순종굴복해야 할 아벨적인 존재로서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었다. 따라서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는 것이다(요 14 : 6).
만일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더라면 그들은 이미 조성된 ‘믿음의 기대’ 위에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워, 이 두 기대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음으로써 창조본연의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복귀하였을 것이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천사장(天使長)이 인간을 타락케 하였던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반복하게 되어 아담가정이 세워야 했던 ‘실체기대’는 세워지지 않았다. 따라서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Ⅲ. 아담가정에 있어서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와 그의 상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한 터 위에서 ‘실체기대’를 세움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헌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믿음의 기대’는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복귀되고, ‘실체기대’는 ‘실체헌제(實體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상징헌제’ 및 ‘실체헌제’의 의의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인 3대 축복(三大祝福)은 아담과 해와가 각 각 개성을 완성하여 부부를 이루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자녀를 번식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더 나아가 그들이 만물을 주관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그 3대 축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와 반대의 경로를 따라 먼저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과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워 주는 ‘상징헌제’를 드림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한다. 다음으로는 자녀를 복귀하고 그 위에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워 주는 ‘실체헌제’를 드림으로써 ‘실체기대’를 세워 가지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징헌제’의 의의와 그 목적을 두 가지로 갈라서 생각할 수 있다.
이미 타락론(墮落論)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사탄이 타락인간(墮落人間)을 주관하게 됨으로 인하여 그는 인간이 주관해야 할 만물세계(萬物世界)까지도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서에 만물이 탄식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롬 8 : 22). 그러므로 만물로써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드리는 첫째 목적은 하나님의 상징적 실체대상인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서 만물보다도 거짓된 자리에 떨어졌으므로(렘 17 : 9),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는 창조원리적(創造原理的)인 질서에 준하여 자기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있는 존재인 만물을 통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따라서 ‘상징헌제’를 드리는 둘째의 목적은 실체 인간을 하나님 앞에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실체헌제(實體獻祭)’는 어디까지나 내적인 헌제이므로 만물과 인간의 창 조의 순서가 그러했듯이 외적인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린 기대(基臺) 위에서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운 후에, 이 기대 위에서 다시 인간을 실체적으로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으로서 ‘실체헌제’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실체헌제(實體獻祭)’는 실체 인간을 복귀하기 위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 건’을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인적인 존재가 아벨적인 존재를 실체로 헌제하여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게 되면, 그것이 바로 아래에 해명되어 있는 바와 같이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으로도 세워지게 되기 때문에 ‘실체헌제’는 뜻맞는 헌제가 되는 것이다.
아담가정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기 위하여는 아담 자신이 먼저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아담부터 헌제를 하지 못하였던 것은 아담이 헌제를 하면 그 제물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이 대하게 되어 비원리적인 입장에 서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여기에는 심정적인 면에서의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다. 타락한 아담은 사실상 하나님에게 천추만대(千秋萬代)에 이르는 슬픔을 안기어 드린 죄악의 장본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직접 대하시어 복귀섭리(復歸攝理)를 하실 수 있는 심정적인 대상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 대신으로 그의 차자(次子) 아벨을 세워서 ‘상징헌제’를 드리게 하셨다. 이렇게 하여 먼저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또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운 기대 위에서, 가인과 아벨이 ‘실체헌제’로써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더라면, 부모 된 아담은 그 ‘실체기대(實體基臺)’ 위에 서게 되어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그때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으로써 ‘실체헌제’를 하기 위하여서는 그 헌제의 중심인물(中心人物)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의 ‘상징헌제’에는 아담 대신으로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것과 또 아벨을 ‘실체헌제’의 중심인물로 결정하기 위한 것의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가인이 세워야 했었는데 이것이 어찌하여 아담가정 전체가 세우는 결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 조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이었고, 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굴복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가인과 아벨이 다 함께 자녀로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운 입장에 서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또 가인과 아벨은 선악(善惡)의 모체인 아담을 분립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사탄을 분립하였더라면 그 부모 된 아담은 사탄을 분립한 그 입장에서 먼저 ‘ 실체기대(實體基臺)’ 위에 서게 되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은 ‘상징헌제(象徵獻祭)’와 ‘실체헌제(實體獻祭)’로써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벨이 뜻맞는 헌제를 함으로써 아담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조건과 ‘실체헌제’를 드리기 위한 중심인물로서의 아벨의 입장은 세워졌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 아서 그들은 천사장(天使長)이 해와를 타락시킨 것과 같은 입장에 다시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게 됨으로써 ‘실체헌제’에 실패하여 ‘실체기대’를 세우지 못하게 됨에 따라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Ⅳ. 아담가정이 보여 준 교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첫째 뜻 성사(成事)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떠하셨던가 하는 것을 보여 주셨다. 원래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반드시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의 책임분담이 합하여서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통하여 헌제(獻祭)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분담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헌제해야 된다는 것을 교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둘째, 가인이 아벨을 죽였으나 그 후 하나님이 아벨 대신 셋을 세워 새로운 섭리를 하신 것으로써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인 것이고 인간에 대한 그의 예정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아벨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그가 ‘실체헌제(實體獻祭)’의 중심인물이 되도록 예정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벨이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한 입장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대신 셋을 세우시어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 뜻을 이루어 나아가셨던 것이다.
셋째, 가인과 아벨의 헌제로써 타락인간은 항상 아벨적인 존재를 찾아 그에게 순종굴복해야만 하늘이 요구하는 뜻을 자기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루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한편 아담가정을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것과 동일한 섭리(攝理)는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 후 계속 반복되어 내려왔다. 따라서 이 노정은 오늘날의 우리 자신들도 걸어야 할 탕감노정(蕩減路程)으로 그대로 남아져 있기 때문에,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오늘 우리들에게까지도 전형적(典型的)인 산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