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귀(復歸), 복귀의 심정
복귀(復歸)의 길은 고생하며 피를 흘리면서 가는 길이다.
복귀의 길은 찾아가는 길, 원리(原理)의 길은 밟아가는 길.
오늘날까지의 역사(歷史)는 맞고 빼앗아 오는 역사였다. 그러므로 역사는 맞고 몰리는 무리가 이끌어 왔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자리, 통곡하는 자리로 가라. 그 길이 역사가 흘러 온 골수(骨髓)다.
하늘이 탄식하시는 사정과 애타는 심정을 누가 도맡을 것인가? 아담으로 인하여 맺혀 온 온갖 역사적 조건을 자신이 탕감(蕩減)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아담을 원망 말라. 그를 이해하고 동정해라. 그래야만 아담을 통하여 출발하지 못한 뜻이 우리로부터 출발된다.
우리는 줄기요 잎사귀요, 하늘은 뿌리이다. 잎사귀가 하나 생기게 되면 그만큼 뿌리에서는 더 큰 싸움이 벌어진다.
하늘은 인간을 위하여 모든 희생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도 잊으려고 하지만, 사탄은 빚지운 것을 조건삼아 우리를 치려고 덤벼든다.
개체(個體)를 놓고 하늘의 한(恨)이 맺혀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개체를 중심삼고 움직이지 말고 6천년간 맺혀진 하늘의 사정을 풀어야 할 역사적 결실체(結實體)로서 움직여야 한다.
마음과 몸, 형제, 국가, 세계, 하늘과 땅 사이에 맺혀진 모든 탄식의 장벽(障壁)을 헐어 드리지 못하면 하나님은 결코 나를 통하여 기뻐하실 수 없고 사랑하실 수 없을 것이다.
선생님은 감옥(監獄)에서 고문(拷問)을 당할 때도 ‘하늘이 이런 길로 보내게 될 때, 가라!’ 하는 생각보다 어차피 가야 할 곡절(曲折)이 있었던 하늘의 사정을 먼저 생각했다.
선생님의 가슴에 묻힌 사정(事情)을 누가 알겠나? 처자도 모른다. 외로운 선생님이다. 어느 누가 ‘당신은 이런 사정이 있지?’ 하고 그 사정의 밑창을 건드리면 대번에 대성통곡(大聲痛哭)할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여러분처럼 젊은 시절에 청춘을 즐길 줄 몰랐다. ‘어서 꽃다운 청춘이 지나가라’ 하면서 사십(四十)을 바라보고 살아온 선생이다.
선생님의 재산(財産)이 있다면 피눈물, 하나님까지도 울지 않을 수 없는 이것밖에 없다.
송거원세지년(送去怨世之年)
환래행세지년(歡來幸世之年)
천주지원 효진(天宙之願 孝進)
중생지원 충진(衆生之願 忠進)
선생님은 남이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했고, 남이 꿈꾸지 않는 것을 사실로 인정(認定)시키기 위해 몸부림쳐 왔다.
선생님은 통일을 어떻게 할까 염려하지 않았고,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어떻게 세울까 하는 것을 염려해 왔다.
선생님이 생일에 금식(禁食)했다는 오늘의 역사가 후손에게 전해질 때, 그것은 위대한 전설의 자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은 학식 있고 권세 있는 자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길, 가시밭길을 평지로 만들기 위해 피눈물나는 수고를 하는 자를 찾아오신다.
만세지원 통일세계(萬世之願 統一世界)
천지지원 통일교회(天地之願 統一敎會)
축복(祝福)이나 역사적인 귀한 인연의 상속(相續)은 십자가상(十字架上)이 아니면 안 된다.
우리가 언제 아벨처럼 제단을 쌓으려고 수고를 하였으며, 어느 때 우리가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예수처럼 고생을 한 적이 있느냐?
예수님의 피와 살은 피와 살이 아니라 예수님이 품었던 세계요, 천국이상(天國理想)이었다.
끝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전체적인 상속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상속해 주지 못하시고 보류하고 찾아오신 그 인연들을 십자가상에서 심정적인 조건으로 맺어 놓고 받아야 한다. 그런고로 끝날에는 모든 보류한 조건들을 실체적으로 심정을 걸고 세워야 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전체를 참부모님께 상속해 주기 위한 복귀역사요, 우리 인류는 나타날 참부모와 일체(一體)가 되어서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아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대한 하나님의 뜻은 세계적인 이념으로 섭리하셨는데, 그 뜻을 대한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것만으로 만족하려고 하였기에 실족(失足)하고 말았다. 그러기에 끝날 천주 복귀(天宙復歸)의 이상(理想) 앞에 선 우리도 그 하나님의 이상과 동행(同行)해야 한다.
알아줄 수고를 선생님이 몰라주면 하늘이 알아준다.
지금도 하나님은 안경을 끼고 바라보신다. 당신의 자녀를 안경을 끼고 보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한가? 우리들이 그 안경을 벗겨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시련(試鍊) 속에 두시고 치시는데, 이것은 악을 무찔러 내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되게 하시고 내 심정을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되게 하는 기준(基準)까지 도달(到達)시키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공평(公平)하시고, 또 사랑이시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세 번 이상은 그 마음을 통하여 갈 길을 인도해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 화합(和合)되는 곳에 나타나신다. 복귀섭리의 목적도 화합되지 못한 피조세계(被造世界)에 화합될 수 있는 중심을 세워, 하늘의 사랑의 범위를 넓혀, 맺혀진 한(恨)을 풀고자 하시는 것이다.
역사상 최고의 불쌍함과 억울함과 분한 노정을 걸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종교는 이런 불쌍하신 하나님을 해방(解放)시키자는 것이며, 이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외로운 섬에서도 홀로 돌감자를 심어 모셔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도인이다.
선생님은 망상적(妄想的)이고 공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실질적인 선생님이다. 파고 들어갈수록 마음이 조여들 수 있는 슬픔의 심정이 묻혀 있는 선생님이다.
참된 하늘의 아들 딸들은 선조(先祖)의 역사적 과오에 애통한 마음을 갖는 자다.
노아는 황무지(荒蕪地)와 같은 천하(天下)에 비로소 하늘이 닻을 내릴 수 있는 기점(基點)이었지만, 노아 자신은 그것을 몰랐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조상들은 하늘이 찾아온 이런 심각한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여 왔다. 이스라엘 민족도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찾아왔지만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재탕감노정(再蕩減路程)을 걷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 때를 알고 그 시기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심정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하늘섭리의 기점(基點)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그런 사람이 없다. 그러니 이 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황무지와 같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떠나 하나님의 입장에 들어가 한번 생각해 보자. 복귀의 터전과 사람이 필요한데, 그것이 되어 있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울 것이냐?
복귀역사는 먼저 하나가 수습(收拾)되어 가지고 전체가 섭리(攝理)되어 나간다.
부자(父子)간의 심정은 혁명(革命)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부자지인연(父子之因緣)을 가르쳐 주는 것이 최후의 목적이다.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무기는 부자지인연이다.
기독교는 아버지를 가르쳐 주려고 했지만 똑똑히 못 가르쳐 주었다.
역사의 모든 것이 없어져도 남아야 할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너는 나의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할 수 있는 자녀를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하늘이 가장 바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30년 준비기간은 눈물, 3년 공생애(公生涯)는 땀, 3일 부활기간은 피흘리는 기간이었다.
복귀역사는 상징역사(象徵歷史), 형상역사(形象歷史), 실체역사(實體歷史)의 순(順)으로 해오셨으며, 이 한 단계를 올려 놓을 때마다 하나님은 큰 혁명을 각오하신다. 상징역사에서 수천 명을 희생시켜도 형상역사를 인계받는 한 사람이 귀하고 소중하다.
자기가 필요할 때 만날 선생으로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의 섭리의 방향과 개인이나 국가의 방향이 일치하면 그 개인이나 국가는 흥하는 것이다.
복귀섭리 역사는 모자 협조(母子協調)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모자협조가 있기 전에 부부 협조(夫婦協調)가 있어야 되고, 부부 협조가 있기 전에 부녀 협조(父女協調)가 있어야 한다.
창조도 하나부터 했으니 재창조(再創造)도 하나부터 시작한다. 고로, 말세(末世)에는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인연은 전부 다 분열되고 갈라져 개인주의 사상이 도래되는 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
부활절(復活節)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미래(未來)를 상상하고 각오를 더 높이는 기념일이 되어야 한다.
[※심정부활의 날 선포(1960년 4월 17일), 실체부활의 날 선포(1961년 4월 17일)]
통일교회는 죽지 않고 쉬지 않고 발전할 것이다.
때가 귀하다. 봄에 씨를 뿌려야 하는데, 가을에 뿌리면 겨울이 지날 때까지의 고통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진정 나에게 원하는 바를 찾으라! 이것이 없으면 목적없이 항해하는 배와 같은 것이다. 이 원하는 바를 찾아서 역대의 선조들이 어떤 때 실수한 것을 나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되는 것이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바늘 끝에 선 것과 같은, 그러한 영적(靈的) 분위기 속에서 지내 왔다.
여러 가지의 맛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사람도 갖가지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단맛도 지나치면 싫지만, 그 어떤 맛도 알맞은 때에는 멋진 것이다. 통일교회는 이런 것을 중심해서 통일하자는 것이다.
복귀섭리의 목적은 화합되지 못한 피조세계에 화합될 수 있는 한 존재를 세워서 사랑의 범위를 넓혀 개인, 가정, 국가, 하늘에 맺혀진 것을 우주적으로 풀고자 하는 것이다.
본성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나를 버리고 아버지 앞에 부족한 마음으로 통회하는 온유겸손의 자아를 찾아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을 한 몸에 지니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왔으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 노력치 않았으며, 타락인간에게 그 영광과 소망의 뜻이 나타나도록 33년간 희생한 것이다.
승패의 결정은 과거나 또는 미래에서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
선조가 세워 놓은 길을 후손이 따르지 못할 때 탕감이 오는 것이다. 선조들이 가졌던 이상의 목적을 가져야 한다.
없어서는 안 될 무리가 되라.
가나안에 들어가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나안 땅에 있는 원수들을 격퇴하여 원수를 갚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행동과 자기의 생명과 자기의 심정을 책임져 주는 사람을 찾고 있다.
하나님이 역사적인 공매장에 여러분을 끌고 가셔서 공매에 부칠 때 여러분은 얼마만한 가치가 될 것인가?
눈물이 앞선 자리에서 복귀의 터전은 밝아온다.
인간은 있대야 일대의 한이 있지만, 하늘의 한은 역사적인 한이요, 원수는 역사적인 원수다.
다리가 구멍이 뚫리고 휘청거려도 또 가야 할 여러분이다.
하나님과 내 마음이 하나되는 것이 제1 대상이요, 내 마음과 내 몸이 하나되는 것이 제2 대상이요, 하나님과 자녀가 하나되는 것이 제3 대상이다.
우리는 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울어진 가세를 수습하여 재기하려는 주인이라면 몇 해 가지고 되겠느냐? 한 가정도 그렇거늘, 하물며 한 국가가 기울어진 운세를 바로잡으려면 얼마나 어렵겠느냐?
삼천리 강산에는 통일교회의 피와 땀과 눈물이 어려 있다.
편안한 자리에서 되는 탕감은 없다.
선생님처럼 불쌍한 자가 없다. 마음 둘 곳이 없다.
우리가 가는 길은 부모 죽인 자식으로서 가는 길이다. 무덤에 가서 한없이 울며 결의하자.
우리는 이 민족이 자랄 수 있는 온상이 되자.
복귀해 가는 원리는 가르쳐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찾아가야 한다.
썩은 나무들을 잘라 버리고 남은 뿌리를 가지고 새 역사를 개척하겠다는 것이 통일교회를 이끌어 가는 선생의 생각이다.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받고 싶어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가신 예수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목적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영적인 흐름과 사회적인 흐름이 합해지면 세계에 평화가 온다.
운동선수가 처음에 나섰다가 골 라인에 들어서지 못하면 무슨 창피냐?
과정적인 것을 가지고 만족하지 말고, 미래를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현실을 보고 일하지 말고 역사를 보고 후손들에게 미칠 것을 위하여 움직여야 한다.
세계적인 운세를 열고 죽어야 한다.
복귀의 심정과 인연으로 하늘을 부모라고 하고, 참자녀의 입장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대신한 맹세를 해야 한다.
우주의 근본은 ‘부모와 나’다.
하늘은 십자가의 길을 평지로 만들어 주는 자를 찾아오신다.
일편단심으로 최후의 고개를 넘어 승리적인 주관자가 되자.
사탄이 입을 열어 그 자신 스스로 패자로 서게 되었음을 직고할 때까지 우리는 전진해야 한다.
부활이란 명사는 기쁨을 전제하고서만 성립되는 것이다.
메시아는 역사를 바로 움직이게 하는 중심자로 오신 분이시다.
구원은 메시아와 같이 가는 것이다. 마음으로나, 심정으로나, 생활로나 뗄 수 없는 관계가 되면 된다.
복귀의 길은 실로 한이 많은 길이다.
여러분은 실체부활을 통해서 영광실체부활까지 나아가야 하나님의 앞에 갈 수 있다.
나침반의 방향이 남북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것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놓자면 그 보다 더 강한 힘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타락세계를 돌려 놓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이 있어야 한다.
종교는 밑창에서 올라가고 세계사는 상류계급으로부터 하류계급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나는 남겨진 역사의 인연을 상속받았다고 단단히 명심해야 한다.
여러분이 지금 남기는 역사는 천추 만대 추모할 후손들에게 남길 이상세계의 재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슬픈 역사를 상속받았다 할지라도 후손 앞에는 소망의 역사를 넘겨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된다.
절대자의 본질을 중심삼고 출발한 분이 메시아이다.
나의 모든 한과 고통과 슬픔을 한 화살의 힘에 총집결하여 쏘아 원수 사탄의 가슴에 꽂을 신념을 가져야 한다.
광야에 처한 사람은 자기의 인격적인 존중이나 체면을 논위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광야에 있다.
책임 못한 조상이 조상이냐? 아담 해와의 무덤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나? 자식들에게 무덤을 밟히지 않도록 하자.
때를 알라! 때가 된 다음에 보면, 그때는 벌써 지나가는 것이다.
민주세계는 공산세계보다 한 단계 앞서 있지만, 종교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세계에도 더 한 단계 앞에 서야 한다.
하늘은 지금도 외치신다. ‘인류 대신, 하늘 대신 싸울 용사는 없는가?’라고….
남에게 주는 작전을 하는 자는 결국 복귀해오는 것이다.
인간 조상은 타락하지 않은 심적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모셨는데도 타락했는데, 우리가 어찌 사람의 힘만으로 구원되겠는가?
복귀원리를 통해서 남겨진 것과 보태 준 것을 비교해야 한다.
하늘을 위해 충성하기로 명세하였다면 그는 비록 오늘에 있더라도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고 역사적인 존재이며, 그가 하는 일은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지신 뜻과 내용을 발표하여 공산당까지 울릴 수 있다면 그 힘은 공산당을 정복하고도 남는다.
메시아 그 자체가 믿음의 목적체요, 소망의 목적체요, 사랑의 목적체이며, 또한 전인류의 신앙의 결실체요, 소망의 결실체요, 사랑의 결실체이다.
비참한 세상에서 후퇴를 하는 사람은 비참 그 너머에 있는 행복을 차지할 수 없는 것이다.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종말사적인 비통에서 승리하면 오시는 주님은 그런 것과는 상관 없게 된다.
세계 인류는 아담 한 사람을 복귀하기 위한 자료인 것이다. 따라서 6천년의 역사는 아담복귀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혈선을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교단적인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이 동역 동사(同役同事)할 수 있지만, 민족적인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의 협조 없이 이 교회가 내적 영계가 되어서 외적인 세계를 구해야 한다.
뜻을 이룰 때까지는 먹어도 죄요, 입어도 죄요, 자도 죄다. 하물며, 일하지 않으면 얼마나 죄가 되겠느냐?
괴롭고, 슬프고, 외롭고, 분하고, 억울한 것을 기쁨으로 늠름하게 넘길 수 있는 신념과 의지가 필요하다.
선생님은 솜바지 저고리가 다 젖도록 기도한 것이 얼마인지 모르고, 칼을 가지고 맹세한 것이 몇 번인지 모르고, 죽음의 고비를 마음에 다짐한 것이 몇천 번인지 모른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 얼마나 심각했겠느냐! 천사는 일대의 심정으로, 야곱은 천년의 심정으로 대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탕감복귀는 똑딱하는 순간이다. 과정은 길지만 완성의 시간은 순간이요, 완성했다는 그 시간부터 문제가 된다.
하루는 8만 6천 4백 초이다. 이 시간 가운데 뜻을 지키고 세우는데 동원되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1초라도 내가 책임지겠다고 해야 한다.
패자의 결과를 체험하라. 패자가 된 다음에 느낄 내용을 지금부터 내적으로 느끼고 가자. 패자의 서러움이 얼마나 비참하다는 것을 출발 때 느끼고 가지 않는 사람에겐 승리의 영광이 없다.
완전복귀되려면 하나님의 동정, 참부모의 동정, 형제들의 동정을 일시에 한 자리에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심정적인 통일적 3위기대가 이루어진다.
다른 도주(道主)들은 타락한 혈통을 받고 나서 거기서 그냥 선택받는 것이고, 예수는 탕감을 받고 타락과 관계없는 혈통을 타고났다.
싸움의 명령은 대통령이 하지만, 끝난 수습은 부대장이 하는 것이다.
참된 아버지·남편·오빠·아들, 참된 어머니·아내·누이·딸의 이 8수의 기준이 참되게 못 된 것이 한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비참한 것이지만, 하늘은 이것을 자랑하고 세워 주려고 했기 때문에 부활의 권한이 생기고 만민의 살 길이 되었다. 그 이상의 것을 자랑하면 더 넓게 발전한다.
이스라엘에는 4천 년 동안 메시아가 오신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오신다고 자신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다. 국가적인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① 인간을 아들 딸로서 사랑하지 못했다.
② 그 아들 딸을 성례해 주지 못했다.
③ 그러한 한 가정을 사랑하지 못했다. 이것을 복귀하는 것이다.
메시아 한 사람을 찾기에도 무한한 역사적인 수고가 있었다. 가정, 종족을 세워 나가는 것 이상 하늘에 기쁜 일이 있을 수 없다.
탕감조건에 순리적인 길은 없다.
역사와 우주를 품고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를 흘려야 한다.
서양 선진국가에서는 복귀를 실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 한국은 역사와 처지가 이것을 실감나게 한다.
죽음을 두려워해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다. 원수에 대하여 복수하지 않고 복을 빌어 주면 거기에 남아진다.
제1차 7년노정은 개인의 전통을 세우는 것이었고, 제2차 7년노정은 가정의 전통을 세우는 것이다.
하늘은 목표를 위해서 일을 하다가 조건을 세워서 연장할 수 있지만, 인간은 일생이라는 한계선 안에서 달성해야 한다. 가면 갈수록 바쁜 것을 느껴야 한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짐을 풀어 놓는 것이 아니고 짐을 바꾸어 지는 것이다. 내가 짐을 무겁게 지면 질수록 그것은 만민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 사람을 통해서 만민에게 복을 나누어 주어야 하니 복의 기관이 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고 천당 가자!’ 하면서 그렇게 믿고 나가지만, 통일교인은 통일교회 믿고 세계를 구하여 주고, 세계가 오히려 ‘당신도 필요합니다.’ 하고 통일교인을 끌어 주면 그때에야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체적인 동기가 되어 이루어 놓게 되면, 거기엔 탕감이 따르게 된다.
복귀역사를 상속받기 위해서는 영계에 가서도 그 모든 것을 승리했다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오시는 주님은 영적인 승리의 열매요, 육적인 승리의 출발자이다.
죽은 피를 받고 태어난 존재일진대 완전히 죽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이 부활할 수 있다.
복귀의 역사는 제일 싫은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통일교회는 종교를 중심삼은 산 하나님의 사상을 세상에다 펴자는 것이다. 이 뜻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지옥가는 사람들의 수가 막대해진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복귀의 연한(年限)을 단축하고 싶은 것이다.
전쟁의 동기는 남·여, 나·너 때문이다. 부모·부부·형제의 싸움이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에는 적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열매요, 시대적인 중심이요, 미래의 조상이다.
하늘나라에 입적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다시 말하면, 탕감길과 책임분담을 다하고 원리적인 조건을 완전히 갖추어야 한다.
하늘은 판사의 입장이요, 사탄은 검사, 예수님은 변호사의 입장이다. 따라서 판사는 피고를 변호할 수 없으며, 다만 검사와 변호사의 말을 비교 검토하여 판결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악에서 구하고 싶은 심정은 헤아릴 수 없지만, 인간을 들어 변호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 그냥 무죄시킬 수 없으니 탕감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사탄의 참소조건에 걸리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
사탄의 조건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완전하다고 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6천 년 동안 남자를 내세워 복귀섭리를 하셔도 한이 안 풀렸다. 이제부터 여자가 나서서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한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부활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생겨난 것이다.
통일교회에서 식구라는 명사를 쓰게 된 것은 예수가 부모 형제를 갖고 사랑하지 못한 한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이다.
하늘은 세계로 가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세계의 전선에서 투쟁하기 때문에 뒤돌아보고 따라오는 자들을 염려할 수 없는 것이다.
복귀의 진로는 네가 할 일도 내가 할 일이요, 내가 할 일은 물론 내가 할 일이라고 하면서 서로서로 책임지겠다고 하는 것을 중심삼고 개척된다.
원수지간이지만 심정적 인연을 남긴 그러한 사람이 될 때는 역사를 되찾아 만날 수 있고 다시 살 수 있다.
탕감복귀한 후에 또 책임분담이 남아 있는 것이다.
2천 년의 역사를 20년으로 탕감지으려고 하는 것이 3차 7년노정이다.
역사는 축을 중심삼고 돈다. 한 축은 하늘이 잡고, 한 축은 사람이 잡는다.